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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받는 교회/창의 여성

[국민일보]'세상을 바꾸는 크리스천 여성' 소개 - 김윤옥 전 정대협 대표

국민일보에서 올해, 곳곳에서 섬기는 리더십으로 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크리스천 여성 시리즈를 격주로 시작하였고 기윤실 창의여성리더십 위원회 위원장이신 김은혜 교수께서 리더십 분석을 해주셨습니다. 이 시대가 원하는 리더십의 역할모델을 함께 읽어가며 또 다른 섬김의 자리에 서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사는 국민일보의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일왕 유죄 이끌어낸 ‘행동하는 신앙’

훌륭한 의사 아버지를 둔 덕에 의사 남편을 만나 호강하며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 평생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한 삶. 한국 교회 여성사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김윤옥(70)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의 인생이다.

지난 1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다. 2004년 정대협 대표 자리를 내려놓은 뒤 공식 직함은 없지만 각종 강연이나 사회단체 대표 원로들이 모이는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며 지낸다. '선생님의 삶이 곧 한국 교회여성사'라며 기록으로 남기자는 후배들의 요청에 따라 회고록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열심히 살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행복하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나귀를 타고 다니며 쪽복음을 전했고, 아버지는 교토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딴 뒤 함경북도 도립병원장으로 지내며 교회를 섬겼다. 어머니는 원산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웠다. 그런 만큼 교회는 익숙한 곳이었다. 하지만 교인들이 계를 하고, 돈을 밝히는 모습을 보면서 감수성이 예민하던 소녀 김윤옥은 실망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고민했지만 누구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방황이 길어지자 어머니가 신학대에 들어가 답을 찾아보라고 했다. 한국신학대학에 진학했고, 안병무 김재준 문익환 등 당대 쟁쟁한 신학자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밑바닥 사람들의 세상을 보고 교회와 크리스천은 타인을 위한 존재가 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인간차별은 큰 죄악이고, 그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가치관도 그때 형성됐다.

졸업할 무렵 자신보다 공부를 못하던 남자도 목사가 될 수 있는데, 여자라 안 된다는 현실에 부딪혔다. 부당했다. 1969년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여신도회 총무를 맡아 여성목사 안수운동을 펼쳤다. 74년 노력이 결실을 맺었지만, 목회자의 길을 택하진 않았다. 운동을 하며 전국 교회를 누비는 동안, 교회 안의 성차별과 권위주의, 가부장주의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대신 여성 신학자의 길을 걸으며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한국여성신학회의에서 활약했다. 목회자가 안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예수님의 진짜 정신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지 결코 직위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장 여신도회 활동과 함께 67년 결성된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암울한 시기, 유일한 여성단체였다. 74년 김지하와 민청학련 관계자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을 계기로 양심수와 정치범 가족돕기운동을 시작했다. 일본 히타치 회사의 세탁기 등 가전제품 불매운동도 벌였다. 박종석씨가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입사시험에 합격하고도 일을 못하게 된 것에 대한 항의시위였다. 일본과 미국, 유럽 교회의 여성들이 동참했고, 3년 만에 박씨는 회사를 다니게 됐다. 여성들의 힘이었다. 한국 정부조차 모른 척하고 있던 원폭 피해자 운동을 펼쳤고, 일본인들의 기생관광 근절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사회 활동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심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남을 위해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 수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은총으로 느껴졌다.

대학시절 만나 결혼한 남편 손규태(현 성공회대 명예교수)씨와 76∼88년까지 독일 유학을 다녀오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분단국가인 독일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평화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89년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을 개원하고 남북 여성 교류에 앞장섰다. 91년 11월 역사적인 서울토론회가 열렸다. 그는 "북측 여성들이 서울에 와서 토론회를 하고, 92년 9월엔 우리가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올라가 토론회를 열었다"며

"노태우 정권 때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며 감격스러워했다. 당시 회의에서 남북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협력하자는 결의를 했고,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평생 피해자들의 편에 섰지만 "피해자를 위해 움직이고 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고 털어놓는다.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진 그들과 지내다 보니 더불어 피해의식에 빠지고 심리적으로 지치는 시기가 왔다. 그는 "'돈 벌기 위해 매춘부 노릇을 한 것 아니냐'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너무 힘들어 도망가고 싶었지만, 오십 평생 침묵을 깨고 거리에 나와 앉아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면서 도망갈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런 긴 노력은 2001년 남북 여성들이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에 일본 천황을 기소하고,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는 요즘 젊은 크리스천 여성들에게 "꿈을 가지라"는 말을 하고 싶단다. 여전히 교회 여성들이 할 일은 많은데, 자꾸만 가라앉고 침체돼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성경을 봐도 억울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옆에 있던 것은 여성이었다. 베다니집의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칠십 평생을 주님 안에서, 교회 여성으로서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노력해 왔다는 그에게 "신앙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행동이고 생활"이라는 답변이 주저없이 돌아왔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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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김윤옥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여성들은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발휘하기보다 남성 모방적인 여성 리더십을 추구해 왔다. 남성지배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중성화된 모습이나 오히려 남성화된 태도가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현실이었다. 여성들 스스로 자기 안의 여성적 특징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가지 못했고, 사회적 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때론 내재된 여성성을 열등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제 여성적 리더십은 여성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대안 리더십으로 떠오르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독립적이고 이성적이며 책임을 중시하는 남성적인 리더십이 개발과 성장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면 21세기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은 부드럽고 감성적이며 관계 지향적이어서 돌봄과 배려, 그리고 섬김의 가치를 실현하는 여성적 리더십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김윤옥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기독교 안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여성 리더이다. 그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사마리아인 리더십이다. 기독성과 여성성이 성숙하게 결합돼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 그리고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한, 한국역사의 구비구비마다 그 시대의 강도 만난 자들과 함께한 삶이다. 고난받는 현장을 찾아가서 싸매주고 돌봐주며 그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위해 눈물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필요에 책임있게 응답한 리더십이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되물은 예수님의 말씀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웃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이웃이었다는 답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 정신대 할머니들, 원폭 피해자들, 그리고 양심범들에게 김 전 대표가 당신들의 이웃이었다고 묻는다면 그들은 주저없이 "네" 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타자를 위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축복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기 때문이다. 그가 삶을 통해 보여준 리더십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기독여성들에게 귀한 모델이 된다. 여성의 개성과 특성을 창조적으로 개발해 작은 자들과 함께하며 섬김과 배려와 돌봄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실천한다면 기독 여성들로 인해 더 아름다워지는 사회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김은혜<기독교윤리실천운동 창의여성리더십위원회 위원장·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