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 해당되는 글 235건

  1. 2017.08.28 [부채해방운동] 가장 고통 받는 이웃을 돕는 부채해방운동
  2. 2017.08.28 [부채해방운동] 가계부채 1300조원, 벼랑끝 사회
  3. 2017.06.08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② - 백소영 교수(이화여대, 기독교사회윤리학)
  4. 2017.06.08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② - 전상진 교수(서강대 사회학과)
  5. 2017.06.08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양희송 대표(청어람ARMC)
  6. 2017.06.08 새로운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 손봉호 자문위원장
  7. 2016.12.06 [교회신뢰운동]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어디까지 왔나? (1)
  8. 2016.12.06 [특집]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_정병오 본부장
  9. 2016.11.14 제3회 기독교윤리실천학교 "인공지능 시대의 기독교윤리" 참가후기2 오영우 참가자
  10. 2016.11.04 제3회 기독교윤리실천학교 "인공지능 시대의 기독교윤리" 참가후기1 문한나 참가자
  11. 2016.10.31 [간사채용공고] 기윤실에서 활동간사를 모집합니다. (~11/10)
  12. 2016.10.28 [기독교윤리연구소] 목회자윤리세미나 후기
  13. 2016.10.17 기윤실 열매소식지 9-10월호가 발행되었습니다.
  14. 2016.08.08 [성명] 이동현 목사의 성폭력 범죄에 대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입장 (6)
  15. 2016.07.28 [긴급좌담] 김영란법,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볼 것인가? 후기
  16. 2016.06.08 2016년 기윤실 홍보 브로셔를 소개합니다.
  17. 2016.04.27 2016년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실시합니다
  18. 2016.04.27 기윤실 열매소식지 3-4월호가 발행되었습니다.
  19. 2016.04.27 [기윤실포럼] 양극화와 한국사회의 갈등현상 : 주거 교육 세대 노동 - 발제문
  20. 2016.03.16 [2016년 기윤실 회원총회+신년강연회] 불편하게, 즐겁게, 더불어 함께 만드는 기윤실(총회후기)

가장 고통 받는 이웃을 돕는 부채해방운동

 

기윤실은 지난 3년 동안 “양극화를 넘어 더불어 함께”를 주제로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창립 30주년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 이니만큼,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화를 꾀하는 기독시민운동으로서의 역할과 의미를 다지기 위해서지요. 무엇보다 1987년 창립당시 시대의 절박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응답으로서 탄생한 기윤실은 지금 이 시대의 아픔을 관통하는 이슈를 선정하고, 이로 인해 고통 받는 이웃들을 돕고자 했습니다.

 

87년의 시대적 열망이 민주화였다면, 지금 이 시대의 가장 절박한 이슈는 ‘양극화’입니다. 주거, 교육, 보건, 식량, 일자리, 소득 등 모든 영역에서 양극화 현상은 그 정도만 달리했을 뿐 어디서나 발견됩니다. 특히, 지난 몇 년사이 ‘N포세대’ ‘수저계급론’ 등 시대의 절망적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는 용어들이 등장하면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회문제로서 양극화가 재부각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기윤실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양극화’를 주제로 다양한 포럼을 열어, 성서와 사회, 정치와 경제, 교육과 노동, 그리고 주거에 이르기까지 양극화이슈를 다양하게 살펴보면서 첫째, 한국 사회에서의 양극화의 현상과 원인을 살펴보았고 둘째,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관심과 실천으로 변화될 한국사회의 모습을 그리면서 기윤실의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부채해방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사회는 ‘빚 권하는 사회’, ‘빚으로 지탱되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4년제 대학과정이 5년 6년으로 늘어나는 것은 기본이고, 2~3가지 아르바이트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학자금에 생활비까지 대출을 받아야 합니다. 졸업하면 유례없는 취업난을 간신이 뚫고, 취직한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주거환경 마련을 위해서는 또다시 대출을 받아야 합니다. 학자금, 전월세자금, 자녀학자금, 은퇴자금 등 생애주기별로 연결되는 빚의 고리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현실입니다. 빚으로 지탱되는 어두운 일상은 소중한 이웃들을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내몰고 갑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기윤실은 빚으로 삶이 무너진 이웃들을 돕기 위해 부채해방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첫째, 경제금융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구성 • 운영해서 구체적인 실천방안들을 모색합니다. 둘째, 기윤실 학교를 열어 부채1300조원 시대의 기독교윤리를 탐색합니다. 셋째,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돌아보아야 할 이웃, 부채문제로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실천 방안들을 소책자로 구성하여 널리 알립니다. 넷째, 부실채권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단기적, 장기적 방안들을 실천합니다.

 

 

벌써 이 소식을 듣고, 향상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관심과 참여를 보내주고 계십니다. 앞으로의 부채해방운동을 기대해주세요.

 

글 _ 박진영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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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 1300조원, 벼랑끝 사회

 

지난해 연말 가계부채가 1300조원을 넘어섰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1300조원 이라는 엄청난 금액의 정서적 거리감 때문인지, ‘빚도 능력’이라는 말이 돌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학자금을 시작으로 주거비 마련 등을 위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1300조원의 가계부채가 무감각해질 정도로 일상화 되어있음에 다시한번 놀랐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출처 : 이투데이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1416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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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 〈2016년 가계금융 ․ 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6년 3월말 현재 가구당 보유자산은 3억 6,187만원으로 전년에 비해 4.3% 증가했고, 부채는 6,655만원으로 전년에 비해 6.4% 증가했다. 가구당 보유자산 대비 가계당 부채금액의 비율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부채의 구성을 살펴보면, 금융부채 70.4%(4,686만원)으로 전년에 비해 7.5% 증가했고, 임대보증금 29.6%(1,968만원)로 전년대비 3.8% 증가했다. 금융부채에서 담보대출은 3,847만원으로 57.8%를 차지했다.

 

출처 :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photos/1991000000.html?cid=GYH20161220000800044&input=1363m

 

 

특히, 가구주 특성별로 보면, 연령대는 ‘50대’, 종사상 지위는 ‘자영업자’가구의 부채가 가장 많았는데, 자가보유시기, 자녀의 혼인, 정년퇴직 이후의 삶 등 삶의 변곡점이 많은 시기의 부채가 많다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일보(2017년 5월 19일 "100만명 빚 완전탕감 공약, 기대 우려 교차“ 김동욱 기자)에 따르면 이명박 후보 당시 신용7등급 이하 720만명에게 신용대사면 즉 빚 탕감 및 연체기록을 삭제해주는 공약을 내세웠으나, 신용회복기금 조성 등으로 실제 수혜를 받은 사람은 49만명이었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국민행복기금을 조성하여 320만 채무불이행자들의 빚을 탕감해주겠노라 약속했지만, 국민행복기금을 통해 수혜받은 이들은 약 58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올해 국민의 기대를 안고 새롭게 들어선 문재인 정부 역시 가계부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을 여신관리지표로 활용함으로써 부채규모 관리하겠다고 했으나, 실효성 있는 정책이 나오기까지는 아직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빚도 능력’이라면 분명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삶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 ‘빚’말고는 답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핵탄두보다 무서운 ‘벼랑끝’의 삶일 것이다. 빚 때문에 가족관계가 끊어지고, 과노동에 쳇바퀴를 계속 돌아야 한다면, 급기야 빚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끊어야만 한다면 우리사회는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글 _박진영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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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②


※ 이 글은 5월 8일, 평화다방에서 진행된 토론회 원고를 편집한 것입니다.


발제 2.

소수자와의 갈등을 넘어서기 위한


교회와 기독시민의 역할

백소영 교수(이화여대, 기독교사회윤리학)




1. 촛불과 탄핵,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 표출된 갈등,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보기

우리 집도 예외 없었다. 인품 좋은 분들이고 사는 동안 크게 언성을 높여 싸울 일이 없었던 친정 부모님과도, 시댁 부모님과도, 여지없이 한판 붙었다. 계기는 촛불집회에 아들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찍은 인증샷 때문. 이후 시어머님은 태극기 집회를 빠짐없이 참석하시며 인증샷을 가족 단톡방에 올리셨다. 이 일을 계기로 양쪽 어르신들의 연대가 급격하게 두터워졌다. 남과 북으로 나뉜 이 슬픈 나라에서 이젠 가족 간에도 양분되는 가슴 아픈 갈등을 보며 “세대 차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발제는 전상진 교수님께서 진행해주실 터라, 나는 같은 현상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풀어보려 한다.

‘여성주의’는 현 체제 밖의 시선이고 사유이고 언어이다. 모든 ‘여성’이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 해도 가부장제를 관통하면서 남성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과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고 순응했다면, 아니 오히려 적극 가담해서 한 자리 차지했다면 그녀들은 ‘여성주의자’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되 은유로는 ‘남성’이다. 때문에 ‘여성주의적’이라는 말은 생물학적 ‘여성’이나 구성적 특성으로서의 ‘여성성’과 반드시 일치하는 단어는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시스템 안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떤 것, 새로움을 가져올 수 있는 ‘시스템 바깥’의 의미이다. 도전적이고 진취적이고 경쟁해서 승리하는 ‘남성’이 지도자의 자질을 갖는 ‘약육강식’의 동물적(실은 동물이 더 낫다. 배고프지 않은데도 잡아먹는 건 인간사회뿐) 시스템이 21세기 신자유주의적 고용유연성의 관료제적 자본주의와 만나니 체제 밖으로 배제된 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게 되었다. 현재 ‘남근중심적’(공격적, 경쟁적, 이성적, 효율적, 기능적, 개별적 혹은 조직이기주의적) 사회구조는 사다리의 제일 꼭대기에 자리를 차지한 소수가 권위를 독점하고 자기들 아래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과 종류와 속도, 그리고 죽음까지도 좌지우지하고 있다. 오천 년 가부장 역사 가운데 가장 대규모로 가장 지속적으로 시스템 안에 있으나 그 시스템을 만드는 데 참여한 바 없고 그 시스템 안에서의 자기 위치 역시 스스로 결정한 바 없었던 여성들이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주의’를 “여성주의”라고 부른다면, 시스템 바깥에 배제된 남성들도, 그리고 다른 소수자들도 포함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이름을 달리 부를 수도 있다. ‘보편주의’ ‘평등주의’ ‘無/脫 계급주의’・・・ 그러나 이제껏 공적 테이블의 합의와 결정방식에 자신들의 의미가 반영된 바 없었던 ‘소수자들’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대변하기에 “여성”만큼 적절한 이름이 또 어디 있을까.

 


2.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체의 답

추운 겨울부터 봄까지 광장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은 마주보기를 원했다. 계급장 떼고, 성별 떼고, 나이 구분 떼고, 모두가 한 시민으로서 자신의 의미를 전하는 일을 축제처럼 즐겼다. 어이없는 일은 이를 위협으로 여긴 사람들이 비단 위계적 리더십을 독점한 상층부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권력도 부도 가지지 않은 ‘어르신들’은 촛불 정국을 낯설어 했고, 나아가 불안해했다. 소위 6.25세대라는 그들의 공동기억도 한몫 했을 일이고, 산업화 세대라는 그들의 ‘업적’이 부정당하는 느낌에 대한 분노였을 수도 있다. ‘우리’가 (살기 좋게) 만들어놓은 이 시스템을 부정하고 뒤흔들다니! ‘어르신들’의 분노는 그들이 성취했고 정당하다고 믿는 위계가 전복된 것(혹은 될 것)에 대한 불안감이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통치자와 시민(거의 ‘신민’), 고용자와 노동자 사이를 ‘위계’로 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빠짐없이 ‘태극기’쪽에 섰다. 어디 ‘감히’ 시민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리나. 이들은 이미 ‘정답’을 가진 집단이다. 도대체 탄핵 정국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동성애 이슈가 불거졌을 때에도 이들은 목소리를 합하여 이성애를 정답으로 외쳤다. 사람들의 관계 방식에 위계가 존재한다고 믿고, 정답을 가진 쪽이 ‘자신들’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래서 ‘다름’이 드러나거나 답이 달라질 수 있는 열린 토론이 불편하고 불안한 이들이 인정하지 않는 공간은 다름 아닌 ‘사이’ 공간이다. 너와 내가 ‘n분의 1’의 권위를 가지고 마주본 채, 서로의 ‘다름’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서로 의미 있게 마주본 둘이라면 결국엔 중간지점이든 전혀 다른 답이든 함께 할 수 있는 답을 찾아갈 수 있는 관계적 혁명의 공간. 그 ‘사이’를 가져본 적 없는 이들은 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고 응시했던 이들의 의미 표출에 분노하게 된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다. 우리는 내일 있을 투표 결과에 승복하며 내가 뽑은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다수’의 의사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의사 결정이 있기까지 우리 사회구성원의 목소리들을 가능하면 ‘모두’ 마주하는 과정은 필요하다. 내 답과 다르다면 갈등하는 과정도 ‘악’이 아니다. ‘소수자’ ‘약자’라는 말은 반드시 수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심지어 그 수가 많더라도 공적 결정과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 그들의 의미가 들려진 적도 반영된 적도 없었다면, 그들은 ‘소수자’요 ‘약자’다. 그동안 순종적이고 말 잘 듣던 딸이요 며느리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언성을 높인 일이 공동체의 파괴요 인륜을 저버린 행동이라 여기는 한, 우리는 결코 ‘구성원이 모두 행복한 공동체적 살기 방식’을 향해 근접해 가기 어려울 것이다.


 

3. 잃은 양 한 마리까지도 품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기

안타까운 현실은, 가장 작은 자의 의미까지도 살뜰하게 품어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는 기독교인들이 이 엄청난 갈등의 주요 진원지라는 사실이다. 지인이 태극기 집회의 사진을 찍어 보내며 왜 저기에 미국 국기와 심지어 이스라엘 국기까지 있느냐는 질문에 그걸 설명하느라 애썼던 기억이 있다. 역사적 우연성으로 결합되었으나 비본질적인 ‘패키지’는 해체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잃은 양 한 마리까지 기어이 찾아와 공동체에 포함시키는 그 사랑은 어찌 닮으려하지 않는지.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 나라는 믿으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작고 힘없는 사람들의 의미에는 왜 귀 기울이지 않는지. 예수는 가부장제와 제국이 만들어 놓은 권위의 위계가 정점에 달해있던 시절에,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서로 마주보는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고 사신 분이다. 그 관계적 혁명을 이룬 공동체가 ‘교회’인데, 어쩌자고 오늘날의 교회는 또 다시 가부장제와 제국의 위계를 닮아가나. 아니, 오히려 더 앞장을 서나. “네 말이 옳도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당시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작고 작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옳다하시고 그들의 삶의 해석을 받아들이신 예수를 ‘주’로 믿는다면, 소수자·약자와의 갈등을 넘어서기 위한 기독 시민의 첫 역할은 자명하다. 나와 다른 답을 가진 이들을 초청하고 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의 의미를 듣는 일! 단 한 번도 방해받지 않고 내 이야기를 끝까지 해보지 못한 사람들(내가 실재요 은유로서의 ‘여성’이라고 말한)에게 마이크를 내어주는 일, 그것부터 시작해야한다. 그 추운 겨울에 손을 호호 불면서도 발랄하게 무대 위로 뛰어올라왔던 어느 이름 모를 초등학생, 아기 엄마, 노점상인, 그들이 의미가 충분히 들려지고 제도와 정책에 반영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것이다. 안정, 성장, 효용성... 이런 이름으로 생명을 버리는 제도와 정책은 ‘반(反)하나님적’이다. 그러니 교회의 이름으로, 신자의 이름으로 싸워야하는 것은 이제껏 교회의 공적 담론이나 교리에 반영된 적 없었던 소수자나 약자의 ‘낯선 의견들’이 아니다. 싸워야할 무리들과 연대를 하고, 듣고 품어야할 이들에게 칼을 빼드는 어리석음은 이제 그쳐야하지 않겠는가.



2017/06/08 - 새로운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 손봉호 자문위원장

2017/06/08 -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양희송 대표(청어람ARMC)

2017/06/08 -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② - 전상진 교수(서강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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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②


※ 이 글은 5월 8일, 평화다방에서 진행된 토론회 원고를 편집한 것입니다. 


발제 1.

세대갈등 프레임의 쓸모

광장의 대립을 세대 다툼으로 만들어 이익을 챙기는 세력들

전상진 교수 (서강대 사회학과)

 


나는 세대사회학자다. 세대가 관심을 받을 때 내 연구도 주목받는다. ‘물썬 때는 나비잠 자다 물 들어야 조개 잡듯’한다는 속담이 있다. 때를 놓치고 뒤늦게 행동하는 게으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말이다. 지금은 ‘물썬 때’다. 열심히 일할 때다.

 

광장의 소란은 세대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서로 으르렁대는 촛불과 반촛불로 광장이 가득하다. 촛불은 젊고 반촛불은 노숙하다. 고로 촛불과 반촛불의 대결은 세대들의 싸움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세대전쟁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외관 상 그것은 젊은이와 어르신의 싸움처럼 보인다. 특히 반촛불 집회를 생각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그곳에서 노인들은 정말 사회 전체와 상대한다.

광장 집회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그 참여 인원의 속성을 적확하게 판별하기 어렵다. 여론조사가 밝혀낸 탄핵에 대한 연령별 의견으로 그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여러 조사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탄핵을 찬성하는 의견은 20~30대에서 매우 높고(90% 이상) 60대 이상에서 상대적으로 낮다(50~60%). 둘째, 모든 연령층에서 인용 의견이 우세하다. 셋째, 찬성 의견이 반대 의견의 대략 5배 정도 된다. 그에 비추자면 세대 대결이라는 주장은 명백한 과장이다. 그렇다고 연령이나 세대에서 비롯한 차이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명 긴장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갈등이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세대갈등 프레임 말고 다른 틀로 광장을 살피는 방법이 있다. 예컨대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 또는 법치주의와 반법치주의의 대립 프레임이다. 범법을 저지르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촛불과 제대로 ‘엮인’ 대통령을 구조하려는 반촛불의 싸움이 그것이다. 그것은 세대 프레임과는 전혀 다른 동기와 목적과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세대 프레임은 대립하는 세대 성원의 상호인정을 전제한다. 갈등하는 두 세대는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정당화한다. 연장자 세대의 전횡에 맞서 새로운 미래를 열려는 연소자 세대의 저항 또는 젊은이의 일탈을 바로 잡아 사회를 수호하려는 어르신의 ‘질서 있는 제어.’ 서로 싸우더라도 목표는 동일하다. 세대 공생이다. 젊은이가 늙은이의 억압에 저항하지만 목표는 그들의 제거가 아니라 그들과의 평화로운 삶이다. 반대로 어르신이 나이어린 녀석들의 방종을 다스리지만 목표는 그들의 제거가 아니라 유산을 보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와 달리 민주ㆍ법치 프레임은 엄격하다. 공생보다 판결이 우선이다. 실제 행위가 민주적 원칙에 부합하는지 또는 적법한지를 사실 관계에 근거해서 따진다. 다수의 스모킹 건이 뿜어낸 연기가 포연처럼 자욱해진 지금, 대통령의 혐의는 의혹의 수준을 이미 넘어섰기에 정당성의 측면에서 촛불과 반촛불은 뚜렷하게 갈린다. 증거에 입각한 민주ㆍ법치는 애당초 음모론과 연민과 오롯한 권력의지에 의존하는 반민주ㆍ반법치와 싸움을 벌일 필요조차 없었다.

어떤 프레임으로 광장의 소란을 보는지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 세대 프레임이 “상대방의 선의를 인정”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면, 민주ㆍ법치 프레임은 원칙과 법의 위반 여부를 중시한다. 그러니까 후자보다 전자에 여지가 많다. 갈등하는 세대들은 서로 싸우더라도 상대방을 인정한다. 상대가 자식이거나 부모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이 긴요하다. 광장의 대립을 왜 세대갈등으로 보려고 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 어떤 정치적 이익을 챙길까?

 

첫째, 반촛불 정치세력의 이익. 대통령과의 거리(“진박”, “골박”)가 정치적 프로그램인 세력은 대통령의 추락과 함께 힘을 잃었지만, 맞불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광장으로 진출하면서 부활하였다. 친박세력은 민주ㆍ법치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회피한다. 그것으로는 자신들을 도무지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대갈등 프레임이 안성맞춤이다. 반민주적ㆍ범법 행위는 무대 뒤로 사라지고 세대의 의견(취향) 차이가 앞으로 나선다. 당신 세대의 의견을 존중할 테니 우리 세대의 그것도 그렇게 하라.

그렇게 사실 여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도록 만든 후에 본격적 주장을 제시한다. 종북세력의 음모를 간파한 ‘우리 현명한 애국 어르신’과 그들에게 조종당해서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은 '젊은 녀석들‘. 그렇게 판을 짬으로써 친박세력은 노인들의 고통을 정치적으로 착취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왜 진보는 무능하고 보수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가』(시대의 창, 2016)에서 장신기는 장ㆍ노년층이 진보를 멀리하고 보수에 애착을 느끼는 까닭을 복합적 소외로 규명했다. 노인 빈곤과 노인 자살률에 있어서 한국은 OECD국가 중에서, 그것도 수년째 압도적 1위다.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에서 어르신들의 “총체적인 소외의식”도 크다. 삶도 힘들고 사회적 무시도 참을 수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퇴물 취급이나 당하고 살기도 힘들고 참. 젊은 사람들은 우리 같은 늙은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 못할 거야.”

보수세력은 박정희, 육영수, 박근혜라는 아이콘을 통해 그들에게 자긍심을 제공하여 소외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내가 비록 지금은 이렇지만 소싯적에는 무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일했지 그런데 대통령이 자신들을 배신했을 수도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 너무 버겁다. 반촛불 세력의 정치적 메시지는 그러한 노인들의 손상된 자긍심을 치유한다. 단지 ‘엮인’ 것뿐이래. 어휴, 그럼 그렇지. 치유의 대가로 소외와 억하심정에서 비롯된 정치적 에너지를 지불한다. 그렇게 딜이 성사되었다. 노인들은 치유 수단을 받고, 정치세력은 그들의 지지를 얻는다. 극단적 구호와 행동이 문제라고? 아니다.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사람들이 맞불 시민을 혐오하고 적대할수록 에너지는 커지고 지지층도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둘째, 친촛불 정치세력의 이익. 한국의 진보세력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언제나 젊음과 진보에서 찾기에 노인들의 사정에 별반 관심이 없다. 특히 21세기의 크고 작은 선거에서 자신들의 지지자를 동원하고 결속하기 위해 낡음과 새로움, 늙은이와 젊은이의 대립을 이용했다. 그렇게 노인차별이나 혐오를 유포한다. 멀게는 2007년 대선 후보의 해프닝(“노인 분들은 투표 안 하고 집에서 쉬셔도 된다”), 가깝게는 “선거연령 18세 하향”과 “공직자 연령 제한의 제도화” 주장이 있다, 선거연령과 연령 제한은 모두 충분히 토론되어야 할 사안이다. 다만 그러한 논쟁적 사안들을 거의 같은 때에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주된 지지층이 누구인지를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자백한다. 또한 친촛불 정치세력은 젊은이들의 투표 독려에 주력했다. 자신들의 정치적 프로그램이 특정 연령층만을 조준하지 않는데도 그런다. 어차피 노인은 보수를 지지할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청년에만 공을 들이는 것이다. 박력은 인정, 그러나 참 아둔하고 무모한 박력이다. 이미 궤도에 안착한 저출산고령화 추세를 고려하면 더 그렇다.

 

광장의 소란을 세대갈등으로 보면 안 된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세대들의 싸움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 곧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문제임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노인 혐오와 차별도 키운다. 혐오와 차별은 어르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더 강하고 독하게 만들어 그들의 고통을 착취하는 정치세력의 배만 불릴 것이다. 대응역시 더 강해지고 독해질 것이며, 노인 혐오와 차별역시 더 세질 것이다. 그렇게 소외와 혐오와 적대의 악순환이 공고해질 것이다. 사회적 갈등의 해결이 정치의 목표라지만, 현실 정치는 절대 그렇지 않다. 착취할 수 있는 갈등이라면 오히려 독려한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지역 차이를 지역갈등으로 ‘제도화’(“우리가 남이가”)하였다.

 

요즘 가짜 뉴스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가짜 세대전쟁’도 걱정해야 한다. 싸울 일이 아님에도 싸움을 부추겨 잇속을 챙기려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방심하면 가짜 싸움이 진짜 싸움이 된다. 광장의 소란이 진짜 세대전쟁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비록 내가 세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으로 먹고사는 세대사회학자일지라도.



* 원고는 아래 제목으로 실린 글이다. 「광장 대결이 세대 갈등 촉발해선 안 돼」, 『월간 헌정』. 2017. 03, pp.48~51. 



2017/06/08 - 새로운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 손봉호 자문위원장

2017/06/08 -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양희송 대표(청어람AR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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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이 글은 4월 20일, 평화다방에서 진행된 토론회 내용의 원고를 편집한 것입니다. 


발제 2.

갈등을 넘어서기 위한 기독시민과 한국교회의 역할

양희송 대표 (청어람ARMC)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과 사회 내에서의 위상과 역할은 어떠한가? 2015년의 종교인구 센서스 결과는 뜻밖에 개신교가 10년 사이에 한국 사회 1위 종교로 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규모에 걸 맞는 신뢰성과 책임성을 인정받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 괴리현상이 많은 개신교인들에게 고민거리이며, 한국 사회 역시 개신교의 공을 박하게 평가하는 이유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을 통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세월호 참사 (2014.04.16)

이제 3년차를 맞는 이 참사는 한국사회의 총체적 부실과 사태 수습에 있어 무능력함을 드러낸 충격적 사건이었다. 정부나 언론의 문제도 컸지만, 한국교회의 태도 역시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일차적으로 고난주간 수요일에 벌어진 이 사건을 신학적으로나 목회적으로 감당하지 못했다. 안산지역의 교회들 안에서도 목회적으로 충분히 감싸안지 못했고, 교계 지도층들이 종종 던진 발언들도 적절치 못했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에게 다가가는 자세와 공감과 위로의 언어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용된다는 우려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가 보여주었어야 할 우선적 자세는 목회적 접근이고 공감적 태도였을 텐데, 지금도 교회 내에서 ‘세월호’는 금기어로 되어 있는 곳이 너무 많다. 마치 ‘5.18 광주’를 담아낼 적절한 언어와 태도를 형성하지 못한 지난 시절과 유사하다.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여러 사회적 사건들 사이에서 정치적 우려를 앞세우기 전에 어떤 태도를 내보여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닐까?

 


대통령 탄핵 (2017.03.10)

2016년 가을부터 거세게 몰아닥친 국정농단에 대한 시민적 분노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촛불시위가 벌어지도록 촉발했다. 국민 여론이 80-95%선까지 탄핵찬성이었으니 시중의 공감대는 충분히 모아졌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수개월간 폭력시비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되면서 결국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에 이르렀고, 세계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성숙한 민주주의를 보여주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에 반대하는 측도 거리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였는데, 주요한 동원의 축으로 일부 대형교회들이 등장했다. 한국 보수 세력의 주요한 축으로 개신교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입증한 셈이다.

개신교의 정치참여는 해방 이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종종 장로대통령을 배출하려는 열망으로 드러나기도 했고, 반공주의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한 고비마다 개신교가 정치적 동원 대상으로 활용된 것이 여러 번이고, 부정선거나 불법선거에 연루되기도 했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진보적 교회들이 민주화운동 등에 투신하고, 반정부 투쟁에 나선 역사도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역사는 제대로 검토되거나 숙고되지 않은 채 에피소드처럼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특히나 이번 국정농단의 원인제공자로 꼽힐 최태민은 편법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개신교계를 기반으로 정치적 동원에 나선 전형적인 인물이다. 한국교회의 반성과 다짐이 없어선 안 될 대목이다. 기독시민과 한국교회가 정치 참여의 차원과 이슈를 정돈하지 못하면 결국 한국교회는 신앙이 아니라 정치적 지향이 최우선으로 적용되는 공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의 규칙과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어떻게 만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할지 생각과 태도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시급하다.



기독시민 운동과 한국 교회

나는 교회 그 자체가 사회문제나 정치적 사안의 최전방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측면이 많다고 본다. 교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소신이 크게 다를 수 있고, 이를 모아내는 작업은 매우 서툴 가능성이 크다. 그보다는 훨씬 원칙의 차원을 다루어주는 것이 좋다고 본다. 대신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여론을 모으고, 행동에 나서는 역할은 기독시민운동 영역이 나서주는 것이 전문성의 문제나 지속성의 차원에서 더 나은 방법일 것으로 본다.

문제는 우리에게 충분한 숫자나 규모의 기독시민운동이 존재하는가, 교회와 시민단체 간의 유기적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1980년대 이래로 해외선교에 소문나게 열심을 보였다. 이제는 사회선교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사회의 각 영역으로 사회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시민단체를 후원하고, 기도제목을 서로 나누는 네트워크가 조성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안에 교회가 성급하게 나서면서, 목회자들의 사고와 경험치 안으로 사안이 축소되거나, 내부의 공감도 세심하게 얻어내지 못한 채 목회자들의 독단적 판단에 따라 동원되는 양상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갈등과 이견을 다루는 내부의 경험도 없이 사회 내의 분열을 봉합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만용이다. 길이 멀지만, 차근차근 내부 정비를 해가면서 걷는 것이 필요한 시절이다. 성찰과 혁신을 키워드로 기독시민과 한국교회의 역할을 새롭게 고민해 보기를 요청한다.

 

<참고자료>

강성호, <한국교회 흑역사> (짓다, 2016); 김건우, <대한민국의 설계자> (느티나무책방, 2017).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 (IVP, 2017),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 (IVP, 2007).

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Public Faith)> (IVP, 2014).



2017/06/08 - 새로운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 손봉호 자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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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 

※ 이 글은 4월 20일(목), 평화다방에서 진행된 토론회 발제 원고를 편집한 것입니다. 


 

 

 

발제 1.

한국사회의 갈등현상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관점

손봉호 자문위원장 (기윤실, 고신대 석좌교수)






최근 대선 후보들이 사회 통합을 이루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을 보니 사회구성원들이 동감하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갈등해소와 통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시대에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원인 중 하나는 도산 안창호의 말대로, 분열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며 힘을 잃고 퍼져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분열의 이유는 첫째, 도덕성 결여로 서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의 분석에 동의한다. 우리가 단결하지 못하는 것은 서로 속이기 때문이다. 믿지 못하면, 힘을 합칠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도덕성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국제 투명성 기구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청렴도는 세계 176개 국가 중 52위이다.(2016년 발표, 일본은 20위) 도덕적 후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 예를 들면, 탈세율 28% (경제위기 봉착했던 그리스 27%), 보험사기 14% (일본1%), 교통사고 입원율 일본의 8배.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속이며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 서로 믿지 못하는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서 어떻게 통합을 말할 수 있을까. 도산은 ‘거짓말은 군부의 원수’라고 했다. 도산이 애달파했던 상황은 2017년 현재도 여전하다. 기윤실이 창립 초기부터 여러 가지 정직 운동을 해왔다. 그러나 3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할 때 무엇이 나아졌다 싶다.

분열의 둘째 이유는, 이념적 갈등이다. 각자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나쳤다고 본다.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정론이라는 것이 있어서(예를 들면 뉴욕타임즈), 어떤 현안이나 문제에 대해 합리적 관점과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주었는데, 지금 시대는 SNS가 발달하면서 온갖 괴상한 생각에도 근거를 찾을 수 있고 쉽게 퍼뜨릴 수 있게 되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의견만 찾아다니고 수용하여 고집불통이 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그저 다르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기에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도덕적 불신을 극복해야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공정해야한다. 100%는 아니더라도 정직하고 공정한 삶을 살도록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성경적 정의’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남을 속이지 않는 것, 그리고 이웃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해야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가진 이념을 종교와 연결 지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이념을 종교적 상황까지 끌어올려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이념은 비과학적이기에 객관적일 수 없다. 이념을 절대화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성경말씀보다 우선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상이다. 한국사 회는 이념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 이념을 성경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을 성경으로 정당화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극복해야한다. 유일하게 절대적인 것은 성경이다. 그리고 윤리이다. 보수도, 진보도 상대적이다. 자신의 이념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고쳐야한다.

이 두 가지만 극복해도 우리 사회 갈등을 해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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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어디까지 왔나?

 


기윤실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08년, 2009년, 2010년에는 매년 조사를 실시했고, 이후부터는 약 3년을 주기로 조사를 하기로 해서 2013년에 조사를 했고 이제 또다시 조사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교계의 여러 언론과 기관에서 기윤실의 조사를 비중 있게 보도하고 인용하며 한국교회의 갱신을 촉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런 조사를 한다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동안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한 마디로 낙제 수준입니다. 2008년 18.4%, 2009년 19.1%, 2010년 17.6%, 2013년 19.4% 등 20%미만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는 향후 한국 교회가 수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고 개교회 중심주의가 강한 우리 교계 특성 상 새로운 신자의 유입보다는 기존의 신자를 영입하려는 경쟁만이 심화되지는 않을지 상당히 우려스러운 상황을 말해고 있습니다.


 

Schoorman, Mayer, Davis에 따르면 신뢰는 상대방에게 기꺼이 나의 취약성을 드러내겠다는 의지(willing to be vulunerable)’이고, 능력(ability), 호의(benevolence), 언행일치(integrity)를 가진 신뢰할만한 대상에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한국 교회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이는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나야 하며, 교회와 교인들이 깨끗한 양심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제 새로운 조사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번 조사는 2017년 1월에 실시하여 2월 말 경에 발표하려고 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 맞는 교계에 유의미한 자료로 활용되리라 기대합니다. 여론조사에는 많은 재정이 들어갑니다. 감사하게도 여러 회원님들과 교회에서 크고 작은 후원을 해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성원에 힘입어 여론조사는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되리라 예측해봅니다.

 

이 조사를 통하여 발견된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낮은 신뢰문제가 너무 늦지 않은 시일 안에 한국 교회, 교회 지도자, 교인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신실함을 드러냄으로 개선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글_ 박제민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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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6년 기윤실윤리이슈 되짚어보기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정병오 본부장(사회정치윤리운동본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전말이 언론과 검찰에 의해 점차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표출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그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날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정상적인 국정시스템을 마비시키고 국가 정책을 최순실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시켰을 뿐 아니라 남북관계와 외교까지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이 일은 왕정체제에서도 일어나기 힘든 망국적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가고 최순실이 사법적 처벌을 받으면 이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문제가 재발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 사회와 교회는 어떤 반성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박근혜-최순실 사태는 공적권한의 사유화 현상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직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공적인 섬김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는 우리 사회에 편만해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공적 영역이 더 강화되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해 공직자는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의 공적의식과 윤리가 강화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불신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가 앞장서서 기독교인부터 공적의식과 윤리를 강화하는 교육과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청탁금지법(김영란법)과 같은 공직자의 공적의식과 윤리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 마련을 위해서도 기윤실이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의 불투명성과 견제 기능의 상실이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더 곪게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박근헤-최순실 관계가 선거 전에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졌다면, 그리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국회와 검찰, 언론이 제대로 역할을 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청와대와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정보공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회는(특히 여당은) 대통령에 대한 견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검찰은 대통령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많은 권력이 주어질수록 더 투명해져야 한다는 원칙에 의거 정보기록과 공개를 더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원칙에 의거 모든 권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더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검찰에게 부여된 기소독점권을 분산해 검찰 권력도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끝으로 이번 사건은 JTBC와 손석희 사장의 언론윤리가 없었다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공영방송을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들이 권력이나 자본에 예속되어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더욱 빛났습니다. 이는 언론인 뿐 아니라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에 올바른 소명감과 전문성을 가지고 충실하게 임할 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의롭고 살기 좋게 변할 수 있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교인들이 자신이 부름받은 직업의 영역에서 일할 때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일을 하도록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에 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기윤실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 직업의 영역에서 어떻게 윤리적으로 살 것인지에 대한 지침 마련과 제도 개선에 힘쓰겠습니다.



이 글은 2016년 기윤실 열매소식지 11-12월호 특집에 실린 글입니다. 


관련글보기 

2016/11/01 - [성명] 박근혜 대통령의 국기문란과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에 대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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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윤실

올해 이례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받은 바둑대국이 있었습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평소 바둑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이 바둑은 생중계로 볼 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세돌의 압승을 예측했지만, 알파고가 4:1로 승리했습니다. 충격적인 대국 결과만큼이나 사람들의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란 무엇일까요? 컴퓨터에게 양심이나, 배려와 희생같은 윤리의식도 생길 수 있을까요? 또 이런 인공지능의 발전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까요? 인공지능의 발전만큼이나 우리의 미래의 삶에 끼칠 영향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아집니다. 이 궁금증을 함께 풀어나갈 기독교윤리실천학교가 있었습니다.  오영우 참가자님의 참가후기를 남깁니다. ^^


제3회 기독교윤리실천학교 

"인공지능 시대의 기독교윤리" 참가후기2 


오영우 참가자



지난 10월 18일부터 11월 1일까지 3주 동안 기독교윤리실천학교에 개근하였다. 

이번 주제는 ‘인공지능 시대의 기독교윤리’였으며한국외국어대학교 정석오 교수님, 라브리공동체의 성기진 박사님,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박찬수 연구원님께서 발제를 맡아주셨다.


정석오 교수님은 ‘인공지능 너의 정체가 뭐냐’라는 주제로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주셨다. 성기진 박사님은 ‘인공지능이 판사가 된다면 어떨까?’라는 주제로 현재 인공지능의 윤리성을 다루는 연구들이 어디까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알려주셨다. 마지막으로 박찬수 연구원님께서는 ‘제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발전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경제학적 관점에서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서 다뤄주셨다.



기독교윤리실천학교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배경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각도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다학제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더욱 재미있고 흥미로웠던 시간들이었다.

이런 분위기에는 Talking Stone도 한 몫 하였는데, 참가자들은 이 Talking Stone을 갖고 있을 경우에만 원칙적으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참가자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2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길지 않을까 싶었는데,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아쉬울 정도였다.



이러한 나눔의 시간에는 비록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는 지식적인 측면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지만, 그 밑바탕에는 기독교인으로써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삶에 대한 고민 등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윤리실천학교라는 취지에 걸맞은 모습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끝으로 좋은 주제로 발표해주신 발제자분들, 그리고 기독교윤리실천학교를 준비해주신 기윤실 간사님들, 그리고 열정적으로 참여하신 모든 분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인공지능 시대를 향하여 인공지능, 인공지능의 윤리, 기독교 윤리에 대한 우리의 지적탐구, 실천적 고민 또한 닻을 올리고 출항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기독교윤리실천학교 후기보기

2016/01/04 - 제1회 기독교윤리실천학교 참가 후기 (차정아 회원)

2015/12/31 - 제1회 기독교윤리실천학교 참가 후기 (박제우 회원)

2016/07/05 - [기독교윤리실천학교]“기독교윤리, 정치가에 묻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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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례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받은 바둑대국이 있었습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평소 바둑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이 바둑은 생중계로 볼 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세돌의 압승을 예측했지만, 알파고가 4:1로 승리했습니다. 충격적인 대국 결과만큼이나 사람들의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란 무엇일까요? 컴퓨터에게 양심이나, 배려와 희생같은 윤리의식도 생길 수 있을까요? 또 이런 인공지능의 발전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까요? 인공지능의 발전만큼이나 우리의 미래의 삶에 끼칠 영향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아집니다. 이 궁금증을 함께 풀어나갈 기독교윤리실천학교가 있었습니다.  문한나 참가자님의 참가후기를 남깁니다. ^^


제3회 기독교윤리실천학교 

"인공지능 시대의 기독교윤리" 참가후기1 


문한나 참가자


 나는 생명윤리를 전공하는 학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지키고 있으려 노력하면서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다양한 생명윤리 현안에 대해서 청년 기독교인들은 어떤 논의를 하고 있을까..’라는 궁금함과 아쉬움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는 2016년 3월 알파고 vs 이세돌의 대결로 무엇보다 뜨거운 핵심 이슈였지만 기독교관점 뿐 아니라 생명윤리영역에서도 논의되는 곳은 별로 없는 듯 보였다. 나는 또한 학업과 직장의 영역에서 로봇윤리, 첨단기술윤리, 인공지능에 대한 문제가 간략하게 거론될 때마다 이것은 내가 알 수 없는 전문지식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마음과 동시에 언젠가는 그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던 차였다. 그 와중에 평소에 와보고 싶었던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제3회 기독교윤리실천학교의 주제가 “인공지능 시대의 기독교 윤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홍보물을 보자마자 평소에 생각했던 명확하지 않았던 이 인공지능에 대한 개념을 이번 강의에서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신청하고 참여하게 되었다.



기대감을 가지고 갔던 첫 번째 시간에는 “인공지능, 너의 정체가 뭐냐?” 라는 주제로 강의 및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석오 교수님께서 인공지능의 역사와 머신러닝 알고리즘, 빅데이터, 딥러닝 등의 개념을 간략하게 설명하여 주셨다. 또한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로봇윤리헌장과 같이 사회적 합의를 통하여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두 번째 시간에는 “인공지능이 판사가 된다면 어떨까?”라는 주제로 라브리 공동체의 성기진 박사님께서 강의를 진행하여 주셨다. 특별히 판사는 실제로는 단지 법을 적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복잡한 작업을 해야 하지만 ‘주어진 데이터에 일련의 규칙을 정확하게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인공지능시대에 대체가능 직업으로 많이 거론되고 있다. 또한 박사님은 우리가 당장 인공지능 판사를 보기는 어려워도 이미 인공지능의 판단은 현재 일정영역에서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거나 우리의 삶에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모든 컴퓨터는 인간의 윤리적 판단을 흉내내는 수준으로 사람의 명령을 따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결국 로봇이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영역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이 어떠한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능력이 어떻게 정의되던지 간에 인공지능에게 그것을 추월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박사님은 기독교에서 인간성의 본질은 하나님에게로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아무리 발달한 인공지능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마지막 시간에는 “제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발전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을 주제로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찬수 연구원님께서 강의를 진행해 주셨다. 4차 산업혁명이란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에서 한걸음 나아가 사람과 사물사이의 소통을 말하는 ‘초연결사회’를 말한다. 이 4차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경제활동에서 ‘노동’의 의미는 점점 더 축소될 것이며 기존의 안정적 일자리 중심이 아닌 일거리 중심인 긱경제(Gig economy)로 노동 플렛폼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이를 통한 경제적 불평등의 확대 및 포켓몬 고와 같은 사이버가 창조해내는 또 다른 현실세계 내에서의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는 비즈니스 모델 등의 등장이 예견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매 시간마다 돌아가며 토킹스톤을 손에 쥐고 나누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비기독교인과 다를 바 없는 관점에서 이 인공지능시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 영역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고자 하였던 것임을 재차 알 수 있었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결과를 올바르게 예측하여 불필요한 오해는 해소하고 막연한 두려움은 거두어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세계관으로 다가오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하고 살아가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로봇이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시대가 계속 발전할수록 기계를 가진,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부가 축적됨에 따라 사회적 불평등 문제가 심화될 것이라는 공통된 예측에 대하여 부의 재분배에 대한 문제를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논의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미래시대의 노동의 의미에 대한 재정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여 세 번의 강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이 기독교윤리실천학교를 통하여 평소에 잘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훌륭한 강의를 들으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고 또한 이를 시작으로 사회의 다양한 영역을 바라보면서 조금 더 깊이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매우 값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매시간 강의를 지원해주신 간사님들과 강사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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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채용공고] 기윤실 활동간사를 모집합니다. 





안녕하세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입니다. 1987년 창립된 기윤실은 정직한 그리스도인, 신뢰받는 교회,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기독시민운동단체입니다. 아래의 내용과 같이 기윤실 활동가를 모시고자 하오니, 뜻있는 분들의 많은 지원 부탁드립니다. 



1. 모집인원 : 사업담당 정간사 1명, 인턴간사 1명


구 분

직무설명

우대사항

공통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사명에 동의하며 기독시민(대중)의 소양과 교회/교계이슈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있고, 사회 내에서의 성도/교회 역할에 대한 지향이 있는 분.

시민활동 경험

사업당당

정간사

기독시민대상의 캠페인과 교육, 교회 및 교계 사안에 대한 프로젝트 진행, 사회 이슈에 대한 참여운동 기획하는 것 등 운동 전반에 일정의 능력을 갖춘 분

글쓰기, SNS 및 블로그 운영,

디자인, 운전 등

인턴간사

기윤실 30주년기념총회 등 행정업무 지원

전화업무, 문서편집 등의 기술



2. 근무기간 : 정간사(2016.12-), 인턴간사(채용일로부터 4개월)



3. 근무조건

● 근무시간 주5일 ( 주40시간, 탄력근무제, 야간/주말행사 시 대체휴가 등)

 급여

-  정간사 기본급165만원 + 식비 + 부양가족수당 + 근속수당 + 직책수당 + 상여

- 인턴간사 서울시생활임금에 기초한 월급여 (*자세한 내용은 개별 이메일 문의)

 복리후생 1년만기근무시 연차 15일, 퇴직금지급 및 4대보험 (*단, 인턴간사의 경우 4대보험가입만 해당) 2년 1회 정기검진, 안식월(만5년근무시 1개월, 만10년근무시 6개월), 육아휴직 등

  채용 후 2개월 수습적용(급여100%)


4. 전형일정


서류제출

11월 10일(목) 오후 6시까지

서류합격자발표

11월 14일(월) 오후 3시

면접 및 과제제출

11월 17일(목)~18일(금) (*시간조율)


5. 제출서류

 [공통] 간사지원서, 자기소개서, 추천서 (기윤실양식)

 [사업담당] 서류합격자에 한 해 사업기획서를 면접과제로 제출 

   ("한국사회 내에서의 교회 신뢰도 제고방안" 또는 "한국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한계와 방향" 중 택1)

 

기윤실_간사지원서(2016년).hwp

기윤실_간사지원추천서(2016년).hwp


6.접수방법

이메일제목 "[사업담당 or 인턴] ooo 기윤실 간사지원서"

 

이메일접수 cemk@hanmail.net


7. 기타

 채용관련 문의는 이메일로만 접수합니다

 적합한 인재가 없을 시, 채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의 : 박제민 팀장 cem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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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윤리연구소] 목회자윤리세미나 후기 



이 글은 2016년 10월 27일(목) 오후2시,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 지하2층에서 진행되었던 "목회자윤리세미나 : 목회자의 성윤리와 경제윤리" 세미나 참석후기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현장실천참가자 박나래님께서 작성하셨습니다.





지난 27일 기윤실 목회자 윤리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목회자 윤리 세미나가 열린다는 것 자체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목회자 윤리의 문제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목회자들은 사회의 그 어떤 직업군보다도 윤리적이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당연하게 여겨져왔다.그래서일까, 진행을 맡은 이장형 소장(기독교윤리연구소)에 따르면 그동안 목회윤리를 논한 경우는 많았지만 목회자 윤리를 다룬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목회자 윤리에 있어서도 여러 영역이 있지만,이번 세미나에서는 경제윤리와 성윤리의 영역을 다뤘다.



경제윤리 관련 발제를 맡은 신기형 목사(이한교회)는 신뢰를 강조했다.목회자는 목회에 있어서도,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목회자라고 할지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살아야 하기에 돈 문제에 있어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그렇기에 목회자들은 청빈해야 한다는 부담과 물질적 필요를 채우고 싶은 본성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성경은 가난을 멸시하지 않고, 부함을 무조건 나쁘게 보지도 않지만, 돈에 대한 탐욕의 위험성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부를 갖게 되면 그것은 그를 넘어뜨리는 시험거리가 된다.신 목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한 청지기의 자세를 가질 것을 권유했다. 목회자 수입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신 목사는 교회에서 재정 사용의 절차와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과 재정 사용에 대한 재량권을 적절하게 제한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목회자의 성윤리 발제를 하게 된 신원하 교수(고신대)는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목회자 성윤리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되었다고 포문을 열었다. 그는 목회자의 성적일탈 행위에 대해서,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말씀을 잘 전하라고 부여한 권위과 권력에 대한 남용이며, 성도들과의 신뢰를 깨뜨리는 배신행위라고 규정했다.목회자의 성적일탈의 피해자들은 목회자를 넘어뜨렸다라는 낙인 때문에 교회를 떠나거나 심지어 신앙에서 떠나는 등 매우 심각한 내적, 외적 상처를 입게 된다. 가해 목회자들도 제대로 치리를 받고 회복 과정을 거친다해도 다시 사역으로 돌아오는 비율은 매우 낮다.이처럼 목회자의 성적일탈로 인한 결과가 너무나도 심각한 만큼,목회자는 자신을 믿지 말고 문제가 생겼을 때 전문가의 도움 받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신 교수는 목회자의 성적일탈을 개인적 일탈로 치부하고 조용히 덮으려는 태도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신 교수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노회, 총회 차원에서 먼저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원칙대로 처리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해야 피해자의 억울함도 풀어주고, 목회자도 재기와 회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또한 향후 또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목회자의 경제윤리와 성윤리는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윤리적 실책의 영역이다. 실제로 재정비리로,성문제로 무너지는 교회, 상처받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인지 질문 시간에는 분위기가 다소 격앙되기도 하였다. 일일이 언급하기는 힘들지만,목회자들의 윤리적인 문제로 상처받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서 가슴이 아팠다.또한 신학생으로서 바른 목회자 윤리를 가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겁게 다가왔다.사실 이번 세미나에서 발제 된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라기보다는 목회자들의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윤리의 내용이었다. 지도자로서 신뢰받는 사람이 되고,재정을 투명하게 사용하고,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성도들과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하지 않는 것은 굳이 목회자 윤리라고 말하지 않아도 일반적인 상식에 속하는 것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발제가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런 기초적인 부분조차 목회자의 절대적인 영적 권위라는 미명 하에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목회자 역시 연약한 죄인에 불과한만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목회자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공동체안에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세워질 수 있도록 책임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나 역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히 연약한 지체들이 겪는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관련글보기 > 

2016/10/27 - 기독교윤리연구소 목회자윤리세미나 사진 (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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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실소식지(16_09 10)_web.pdf

 

 

기윤실 열매소식지 9-10월호가 발행되었습니다.

 

[특집] 사회 속의 그리스도인

[비전메시지] 빛 권하는 사회, 빚 갚아주는 교회(정병오 본부장)

자살에 대한 교회의 대책 (조성돈 본부장)

부정청탁과 부패의 고리를 끊어야 산다 (신동식 본부장)

[성명] 핵에 의존한 에너지 과소비 구조를 친환경적 에너지 절약 구조로 전환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동역서약'(박제민 팀장)

[회원운동_찾아가는기윤실②] 서울서문교회에 다녀왔습니다.

[회원운동_찾아가는기윤실③] 서교동교회에 다녀왔습니다.

2016/10/17 - 기윤실 회원생활백서 ③ 참여하기!

 

 

2016년 전국기윤실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논평] 청탁금지법 시행을 환영하며, 교회가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만들어가는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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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 목사(전 라이즈업무브먼트 대표)의 성폭력범죄에 대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입장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모독 받는다.

(롬2:22,24)


이동현 목사(전 라이즈업무브먼트 대표)가 청소년과 청년을 대상으로 저지른 성폭력범죄가 교계 안팎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목회자가 그 우월적인 지위를 악용하여 저지른 성폭력범죄 사건입니다. 이는 전병욱 목사(현 홍대새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들의 성폭력범죄에 대해 교계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서 온 결과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동현 목사에게 그의 성폭력범죄에 대한 명확한 책임을 물을 뿐 아니라 교계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판단하며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힙니다.


이동현 목사에게 요청니다.

이동현 목사는 자신의 성폭력범죄에 대해 ‘사역 초기 젊은 시절의 실수’라고 축소하며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행동을 제시하는 대신 일평생 사죄하며 살겠다는 추상적인 말만 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내놓은 대책이 라이즈업무브먼트 대표직을 자신의 친동생인 이동호 사무총장에게 이양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여론이 잠잠해지면 언제든지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입니다.


이동현 목사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피해자 앞에 사죄와 용서를 구하려면 자신이 행한 범죄의 내용에 대해 명확하게 인정하고 어떻게 책임을 질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피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아울러 이번에 드러나지 않은 다른 성폭력범죄에 대해서도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동현 목사는 목사직을 스스로 사직해야 합니다. 영혼을 돌보는 일을 맡은 자가 그 권위를 이용해 영혼을 짓밟은 자신의 범죄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한다면 더 이상 영혼을 돌보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생계를 위한 다른 노동을 찾아 일을 하되 목사로서의 직을 더 이상 수행해서는 안 됩니다.


라이즈업무브먼트에게 요청니다.

라이즈업무브먼트는 조직 차원에서 이동현 목사의 성폭력범죄 행위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그 결과를 공개하고 조직 차원에서 어떻게 책임질지를 밝혀야 합니다. 이는 라이즈업무브먼트가 이동현 목사의 사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기관이라면 당연히 행해야 할 조치입니다.


라이즈업무브먼트는 이동현 목사를 포함해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구성원들에게 조직 차원의 징계를 내려야 합니다. 이동현 목사가 대표직을 사임했지만 회원으로서의 권리는 남아있기 때문에 퇴출까지 고려한 징계를 내려야 하고 사법적 책임을 물을 일이 있으면 조직 차원에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방조하고 묵인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도 함께 물어야 할 것입니다.


라이즈업무브먼트가 이러한 전수조사와 조직 차원의 책임있는 행동, 관련자에 대한 징계를 할 수 없다면 현재의 사역을 다른 단체에 위임하고 조직을 해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라이즈업무브먼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기관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이동현 목사의 사조직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 요청합니다.

첫째, 이동현 목사가 소속된 예장 고신 수도남노회는 이동현 목사를 즉시 면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미 이동현 목사가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하니 그대로 처리하면 됩니다. 이는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세우고 교회의 순결을 지키는 최소한의 조치일 것입니다.


둘째, 각 신학교에 목회윤리 및 성교육 교과과정 개설을 제안합니다. 현재 신학교 및 신학대학원 과정에는 별도의 목회윤리 교과목이 없는 실정입니다. 목회자로서 필요한 학식과 기술을 연마하는 것 못지않게, 윤리 특히 성윤리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셋째, 목회나 제자훈련 과정에서 영적 권위를 사유화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공론화와 신학적 왜곡 바로 잡기, 이를 방지하기 위한 지침 마련 등의 작업이 교단이나 범교계 차원에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종교인의 성폭력범죄에 대해서 가중처벌 및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개정을 제안합니다. 성범죄 직종 1위로 종교인이 꼽히는 참담한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형사제도를 강화해야 합니다. 종교계가 모두 참회하는 마음으로 함께 성폭력처벌법 개정을 추진합시다.

2016년 8월 8일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붙임1. 종교인의 성폭력범죄의 가중처벌 및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개정을 제안드립니다.

(끝)


(붙임1) 


종교인의 성폭력범죄의 가중 처벌 및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을 제안 드립니다.



1. 제안 이유

- 2013년 경찰청의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강간 및 강제추행 범죄로 검거된 6대 전문직 종사는 총 1,181명. 그 중 종교인이 447명으로 1위로 꼽힘.

- 개신교의 경우, 전병욱 목사(현 홍대새교회), 이동현 목사(라이즈업무브먼트) 등이 심각한 성폭력범죄를 일으켜 피해자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임. 전병욱 목사의 경우, 합당한 치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목회를 재개하여 더 큰 혼란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

- 이와 같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개인의 윤리성을 강화는 조치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형사제도를 강화하는 등의 물리적 조치도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고 봄.

- 2011년 11월 개정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일명 도가니법)에 의하면, 장애인의 보호, 교육 등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의 장 또는 종사자가 장애인에 대하여 성폭력범죄를 범한 경우에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하게 하고 있음. 또한 동법은 13세 미만의 여자 및 장애가 있는 여자에 대하여 강간 또는 준강간의 죄를 범한 경우에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고 있음.

- 이를 준용하여 종교시설 및 단체의 장 또는 종사자가 해당 시설 및 단체의 동 종교인에 대하여 성폭력범죄를 범한 경우, 형을 가중하고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법률 개정(일명 전병욱-이동현법)을 고려해볼 수 있음

- 이를 범 종교계 차원으로 확대/연대하여 법 개정을 추진해볼 수 있음.


2. 개정 내용

- 종교시설 및 단체의 장 또는 종사자가 해당 시설 및 단체의 동 종교인에 대하여 성폭력범죄를 범한 경우, 형을 가중함.

- 종교시설 및 단체의 장 또는 종사자가 해당 시설 및 단체의 동 종교인에 대하여 벌인 성폭력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함.

- 위와 같은 성폭력범죄 사실을 인지하고 신고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 처벌함


3. 기대 효과

- 성범죄 직종 1위로 종교인이 꼽히고 있는 가운데, 종교계가 스스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나서 법 개정을 추진하는데 의의가 있음.

- 법 개정 시 종교인들의 성폭력범죄를 상당 부분 방지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음.

- 설사 절차상 법 개정이 어렵다 하더라도 이런 운동을 펼치는 것만으로 종교인의 성폭력범죄를 제어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음.

(끝)


 이동현 목사의 성폭력 범죄에 대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입장.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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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좌담] 김영란법,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볼 것인가? 후기 


[긴급좌담]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볼 것인가? 


* 일시_  2016년 7월 4일(월) 오후 7시


* 장소_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 예배실
              
* 사회_  백종국 경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기윤실 공동대표

* 좌담_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기윤실 자문위원장
             이상민 변호사(법무법인 에셀), 기윤실 감사, 기독법률가회 사회위원장




김영란법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볼 것인가? 좌담녹취록 

김영란법_좌담회_녹취록(최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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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기윤실 홍보브로셔가 나왔습니다.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기윤실을 알릴 수 있는 핵심적인 내용을 담아서 깔끔하고 심플하게 제작하였습니다. ^^  혹시 주변에 기윤실을 알리기 위해 브로셔를 사용할 곳이 있으신 분들은 사무실로 연락을 주시면 보내드리도록하겠습니다. ^^ (담당 : 김효준 간사, 070-7019-3758, cemk@hanmail.net)


앞면은 기존의 사용한 기윤실 포스터와 거의 비슷한 디자인으로 제작하였습니다.


먼저 아래쪽엔 평지를 나타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사야 40장 4절]

기윤실은 2017년까지 한국사회 갈등의 핵심인 "양극화"를 해소하는데 역략을 집중해서 운동을 펼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평탄한 평지가 되는 것을 형상화한 평지의 이미지입니다. 


건강한 토양에 '정직한 그리스도인, 신뢰받는 교회,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라는 기윤실의 사명을 담은 빗방울이 내리는 모습입니다. 


건강한 토양에 맑은 비가 내려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게다가 나무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더불어 살아갑니다. 








뒷면은 열매맺은 나무를 강조하였습니다.

땅속에서는 회원분들의 후원이 거름이 되고 "양극화를 넘어 더불어 함께"라는 큰 나무 기둥을 타고 기윤실의 운동으로 열매를 맺게됩니다.


1. 기독교윤리실천학교

건강한 기독시민의 교양학습터 


2. 한국교회 신뢰도 여론조사


3. 기윤실포럼

양극화 해소를 위한 실천적 대안연구


4. 4.13총선 공명선거운동


5. 자발적불편운동

나부터 지금부터 작은 것부터


6. 부교역자 처우개선운동


7.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8. 교회재정건강성운동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기윤실이 의미있는 운동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기도와 후원 그리고 또 다른 여러 방법으로의 응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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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실시합니다

 

 

2016년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실시합니다

 

 

 

기윤실은 2008년을 시작으로 3년마다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 내에서 갖는 신뢰도에 대한 인식 조사로서, 2013년 문항에 기초하여 전국남녀 1000명 대상으로 전문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하여 진행합니다. 특별히 2016년 여론조사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과 기윤실 창립 30주년을 감안하여 대 사회적 문항을 중심으로 여론조사가 실시 됩니다. 또한 2015년 정부에서 실시한 인구총조사 결과 내 한국사회 종교관련 지수와 더불어,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가 흥미로운 분석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국교회를 신뢰하는가?”라는 기초질문에 약20%내외만이 ‘그렇다’라고 답한 것을 보며 기윤실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노력이 이어져 왔습니다. 불신의 이유로 꼽힌 ‘언행불일치’,‘내부불투명성’등 교회와 성도들의 정직한 일상에 대한 요구가 뼈아픈 질책으로 다가왔던 것이죠. 그리하여 기윤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삶의 모델로서 “자발적불편운동”을 지난 3년동안 진행해왔고, 교회 내 투명성을 위한 노력으로서 “교회재정건강성운동”,“세습반대운동”, “부교역자처우개선운동” 등 다양한 운동들을 펼쳐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일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진행되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한국교회의 신뢰회복 방안 연구를 위해 더욱 힘쓰겠습니다.

박진영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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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실 열매소식지 3-4월호가 발행되었습니다.

 

 

기윤실소식지(16_03 04)_web.pdf

 

 

 

 

 

 

[특집] 2016년 회원총회 + 신년강연회 "양극화를 넘어 더불어 함께"

 

●비전메시지 | 양극화 해소와 기윤실 운동" 강연(임성빈 공동대표)

2016년 사역소개 | 2016년 기윤실 이렇게 일하겠습니다 - 2016년 기윤실 사역안내

2015년 외부회계감사보고서 및 결산요약, 해설 등 세부지표를 보고드립니다. 

불편하게, 즐겁게, 더불어 함께 만드는 기윤실(총회후기)

2016년 기윤실에 기대합니다. 회원 한마디~

 

 

더높은 책무성

[정직윤리운동] 2016년, 기독교윤리실천학교에 초대합니다.

●[교회신뢰운동]2016년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실시합니다

●[사회정치윤리운동]양극화 해소를 위한 실천적 대안연구, 2016 기윤실 포럼

 

 

 

더 깊은 투명성

1-2월 회계보고 후원자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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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기윤실포럼]

 

양극화와 한국사회의 갈등현상 : 주거 교육 세대 노동 


 

이 글은 지난 4월 25일(월) 오후3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진행되었던 "양극화와 한국사회의 갈등현상 : 주거 교육 세대 노동" 포럼 자료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주석 및 발제문 전문은 기윤실 홈페이지 자료실(cemk.org)에 첨부된 PDF 파일을 내려받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윤실 자료실 바로가기 클릭)


 



"자식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오 찬 호 박사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진격의 대학교 』


 

 

   지금세대가 과거와 얼마나 다른 환경에 처한 지를 수치적으로 확인하는 건 구글 검색 몇 분이면 가능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공인중계소 앞에서 한번이라도 머뭇거려 보았다면 ‘달라짐’을 느껴야함은 당연하다. 일례로 1991년에 5500만원 했던 분당의 아파트가 지금은 5억 5천만 원이다. 이 팩트 하나만으로도 여러 논의를 뽑아낼 수 있다. 첫째, 집을 마련한다는 개념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시대의 등장이다. 10년 바짝 모으면 가능했던 시대와 20년을 바짝 모아도 불가능한 시대는 결코 같은 시대가 아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많이 잡는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몸만 피곤할 뿐이다. 둘째, 아파트가 의미 있는 재테크가 불가능해진 시대다. 아파트 가격이 과거처럼 오를리 없다. 그러니 열심히 산다고 자산증가폭이 동일할리 없다. 티끌모아 태산이 아니라 ‘티끌은 모아봤자 티끌’이 되는 시대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같은 청년세대‘안’에서의 균열이 과거에 비해 커질 수밖에 없음을 이해한다. 그렇게 가난했다던 시대에도 ‘내 집 마련을 포기’한다는 말이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N포세대란 말이 자연스러워졌다. 그중 가장 대표적 ‘삼포’ 중 하나가 바로 내 집 마련이다. 무슨 수영장 딸린 3층 저택을 구입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24평짜리 아파트도 가격에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런데 누구는 부모 잘 만난 덕에 ‘주거권’을 쉽게 확보한다. 누구는 당연한 권리를 얻기 위해 몇 십 년간 아등바등 거리는데 누구는 ‘몇 십 년’을 시간 절약 한다. 그러니 이들의 격차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잘 사는 집안의 자녀가 크루즈 세계여행을 가는데 누구는 못 간다면 이는 불평등이긴 하지만 사회문제까지는 아니다. ‘세계여행’이 보편적 인간의 권리는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개인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집’은 그렇지 않다. 사회가 정상이면 ‘열심히 공부한 다음 어떤 일이든 성실하게 주 40시간을 일하면’ 자기 소유의 집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가?

 

 


그때는 그걸 묻지 않았다


시간대가 다른, 그리고 경제적 수준이 달랐던 가정에서 살았던 A, B 이야기를 할까 한다. 이야기는 과거와 다른 상황에 처한 지금의 청년세대의 실상, 그리고 지금의 청년들 안에서의 어떤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 내용을 미리 말하자면 A보다 부유한 가정에 살았던 B가 다른 이유도 아닌 ‘자신이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것을’ 탓하면서 부모를 ‘끊임없이’ 원망하게 된 사연에 관한 거다. 먼저 과거에 살았던 A다. A는 지방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아버지는 A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앞 2평 남짓한 공간에서 떡볶이를 평생 파셨다. 고로 A는 힘겹게 살았다. 과외는커녕 학원조차 맘 편히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A는 개의치 않았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본인이 악착같이 한다면 대학은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A는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했고 나름 사학명문이라 불리는 지방의 한 대학으로 진학했다. 지금은 ‘지잡대’라면서 조롱의 대상이 된 대학이지만 그때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 ‘대학서열’의 상층부 학교, 이른바 ‘인서울’의 이름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지 못한 것은 A에게 약간 아쉬울 뿐이지, 인생의 ‘발목’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좀 더 좋은 조건에서 공부시켜주지 못한 부모에 대한 원망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배적’이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한 후 가정형편상 등록금과 생활비를 부모로부터 받을 수 없었던 A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교 앞 호프집에서 저녁 6시부터 밤 12시까지 서빙을 하는 일이었다. 이는 곧 학점관리의 문제로 이어졌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고 A는 평균 3.0 학점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B학점에 턱걸이를 한 수준이니 학업성적이 탁월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취업과정에서 이것이 문제되지는 않았다. “왜 학점이 이 정도죠?”라고 묻는 사람이 없으니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던 힘든 상황과 이것이 야기된 이유에 대한 원망도 없었다. A의 취업이력서는 단촐 했다. 엄연히 말해 평균 B학점으로 졸업한 대학의 학위증은 당시로서 결코 초라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그 시절, 영어성적과 자격증은 보유한 사람만 적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었다. “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토익을 공부하는 거야?”라는 눈총을 받았던 친구 몇몇만 남들하고 다른 어학능력을 이력서에 기재했는데 이들은 실제 그런 능력을 필요로 하는 희소한 자리로 진출했다. 그러지 않은 곳에서 일할 사람에게 영어능력은 있으면 좋겠지만 없다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변수는 아니었다. 그래서 A는 이력서의 자격증 칸에 군대에서 취득한 ‘태권도 1단’과 ‘운전면허’를 적었고 무난하게 정규직으로 취업했다. A의 부모는 자식이 영어를 배움에 있어서 ‘아낌없는 지원’을 전혀 할 수 없었지만 이 때문에 자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았다. A는 대학에 입학한 후 취업할 때까지 부모님께 딱 한번 손을 벌렸다. 면접 때 입고 갈 정장을 사야 하는데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중에 갚아드리겠다’면서 받은 5만원이 전부다. 이 ‘나중’도 취업의 공백기가 없었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입학과 졸업, 그리고 취업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도움이라곤 받아 본 적이 A는 지금에도 부모님을 늘 공경한다. ‘낳아주고 하루 세끼 밥 굶기지 않으면서 길러주신’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전전긍긍한다. A는 부모로부터 ‘하루 세끼’ 밥 얻어먹는 것조차 대학을 입학한 다음은 그마저도 스스로 해결했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적극적인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해서 나타나는 ‘자녀의 역량’을 과거에는 그렇게 묻지 않았다. 쉽게 말해, 비행기 표 살 돈도 없는 가정이라도 ‘어학연수’를 취업의 기본으로 묻는 시대가 아니라면 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개인이 처한 ‘가난’은 마음먹기에 따라 극복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설사 가난이 개인의 삶을 제약하더라도 감당할만한 수준의 사회였다. 나는 이 시기를 ‘좋았다’라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지금이 이때보다 ‘더’ 나빠진 건 분명하다.

 

 

 


끊임없이 부모를 원망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다


B 이야기를 해 보자. B의 아버지는 중학교 교사이며 어머니는 9급 공무원이다. B 가족은 서울 끝자락에 있는 23평 아파트에 ‘자가로’ 살고 있다. 말이 끝자락이지 시세가 5억이다. 두말할 것 없이 B가족은 ‘중산층’이다. B는 흔히 하는 말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게’ 유년시절을 보냈다. A와 비교한다면 단연코 풍족했다. A는 목욕탕에서 독학했다는 수영을 B는 아파트 앞 유소년스포츠센터에서 무려 3년간 배웠다. A는 사교육이란 것을 고3때 시험을 앞두고 수학학원 3개월 다닌 게 전부였지만 B에게 사교육은 성장과정의 일부였다. B의 부모는 변호사, 의사 집안의 자녀처럼은 아니더라도 또래 평균치 정도는 투자했다. A는 유치원 때부터 집을 들락날락거리는 학습지교사를 만났고 과학캠프, 영어캠프도 꼬박꼬박 참가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터는 동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그래서 ‘더 비싸다는’ 학원도 다녔다. 대학을 입학해서도 B는 A와는 차원이 다른 호화를 누렸다. 등록금은 부모님이 책임졌고 졸업할 때 까지 매달 50만원의 용돈도 받았다. 이처럼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투자를 받으면 자란 B, 그는 A보다 ‘더’ 부모에게 감사를 하고 있을까? 아니다. B는 오래전부터 ‘부모의 지원 부족’이 늘 불만이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이는 반복 그리고 누적되어 이제 B는 자식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모를 ‘능력 없다’면서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B가 부모를 원망하게 된 시기는 특목고 진학에 실패하고 나서부터였다. 중학교 때 나름 괜찮은 성적을 유지했던 B는 3학년이 되어서 외고 진학을 희망했다. 하지만 내신 성적이 ‘퍼펙트 하지 않으면’ 외고입학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B는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외고진학을 희망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B가 다닌 학원의 ‘일반부’보다 수강료가 두 배 이상 비싼 ‘특목고 진학 특별반’을 다니고 있었고 별도의 과외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부터 ‘해외유학 대비반’을 다녔다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각종 경시대회 수상, 입이 떡 벌어지는 영어 공인점수 성적 등은 기본이었다. 이런 업적(?)들은 입시에서 공식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지만, 어떻게든 자기소개서에 기록되어 개인의 경쟁력을 올려준다. 뉴질랜드나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 온 이들도 수두룩했다. 방학 때 다녀 온 사람, 방학‘마다’ 다녀 온 사람, 아예 그쪽에서 학교를 한 학기, 두 학기를 다녔다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B는 생애 처음으로 ‘가정형편’을 탓했다. “왜 나는 어릴 때 외국에 안 보내줬어!”라면서 불만을 토로했지만 부모는 가슴이 먹먹하다. 설마, 중학교 때 외국에 안 보냈다고 ‘부모 노릇’ 못한다는 소리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B는 좌절하기 않고 일반고에서 열심히 공부하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의 입시는 학교에서의 엉덩이싸움만으로 성적이 보장되진 않는다. 몇 백 가지가 넘는 입시 전형방식, 학교별로 달라지는 가중치를 꿰뚫고 있지 않으면 눈 뜬 장님이 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일반고 ‘안’에서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려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일반고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외고, 과학고를 ‘가는’ 시대의 일반고가 아니다. 지금은 ‘능력이 부족해서’ 특목고를 ‘가지 못한 자들이’ 모인 결핍의 공간이 바로 ‘일반고’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러니 학생들은 일찍 감치 열패감에 사로잡혀 공부에 대한 열의를 놓아버리고 선생들은 가르칠 의지를 상실한다. 이는 일반고 학업평균치를 낮춰버리게 되는데 문제는 ‘그래서’ 논술시험이라든가 수시전형의 다채로움에 부합하는 교육과정이 ‘수요가 원체 부족하니’ 굳이 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요하면 ‘알아서’ 학원을 가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학원이 어디 ‘평등’한가. 무상일리도 없지만 돈을 얼마만큼 내는지와 성과물은 비례한다.


B는 논술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대치동 학원가를 찾았다가 5일과정의 100만 원 정도의 수강료가 ‘저렴하다’고 하는 상담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 B는 당연히 이 학원을 다닐 수 없었고 원했던 대학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50만원을 내고 3일 코스라도 수강할 수 있어서 ‘그나마’ 서울소재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족보단 아쉬움이 크다. 자신보다 성적이 낮은 친구가 전담 과외선생 밑에서 포트폴리오 작성에 열중하더니 ‘더’ 유명한 대학에 수시전형으로 진학을 한 것을 알게 된 이상 배가 아픈 걸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B는 다시 부모를 원망한다. 왜 자신의 부모는 허구한 날 “우리는 입시설명회 쫓아다닐 시간도 없고 입시상담 받을 현금도 없단다. 이해해주렴”이란 말을 달고 살았을까. 부끄럽지도 않은가!


대학을 진학한 B는 그래도 열심히 살고자 했다. 하지만 대학은 ‘부모에 대한 원망’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쌓아가는 곳이었다. 취업, 아니 ‘대기업에 원서를 넣기 위한’ 기본 자격으로 필요하다는 9종 세트(학벌, 학점, 영어점수, 어학연수, 자격증, 공모전, 봉사활동, 인턴 그리고 마지막은 충격적이게도 성형수술)는 모두 ‘부모의 소득’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B는 그나마 부모의 도움으로 1년간 매달 22만원의 학원 수강료를 지불할 수 있었기에 토익점수 800점을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답이 없었다. 어학연수는 여태 제주도에도 한 번 안 가본 B에게는 언감생심이다. 자격증으로 태권도단증, 운전면허증은커녕 워드프로세서, 컴퓨터 활용능력 같은 걸 묻는 시대도 오래 전에 끝났다. 향후 진로가 회계사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전문성 어필 차원에서 공인회계사(CPA)를 기본으로 취득하고 금융권에 원서를 넣기 위해서는 증권투자상담사, 자산관리사, 변액보험판매사 자격증 정도는 기본으로 보유해야 한다. 재무설계 전문 자격증인 AFPK(Associate Financial Planner Korea)도 가급적 취득해야 한다. 이런 자격증을 보유한다고 합격보장이 되지도 아니다. 다 갖추고도 백수인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 와중에 공모전을 챙겨야하고 봉사활동을 ‘업적화’해야 한다. 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평가하니 봉사활동도 혹시나 꼬투리 잡힐 ‘야학교사’보단 ‘캄보디아 가서 집짓기 봉사’가 훨씬 경쟁력이 있다. 그러니 ‘돈’이 많을수록 유리해진다. 학점 좀 관리하고 영어점수 높다고 해서 50만원 내고 ‘기업에 따른 적합한 자기소개서 작성법’을 첨삭 받은 자보다 ‘뛰어난’ 글을 쓰긴 어렵다. 운 좋게 서류전형에 합격해도 취업전문학원에 100만원을 지불하고 ‘압박면접’ 예행연습을 한 경쟁자를 이기긴 어렵다. 이 모든 것은 돈과 시간의 문제요, 고로 아무리 효심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부모‘탓’을 할 가능성은 높아졌다. 이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으면 ‘원망하지 않았을’ 부모님이지만 시대는 완전히 변했다. 면접 때 영향을 주는 ‘첫인상’에도 부모의 존재가 개입된다. 인상이 좋은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게 취업의 ‘기본’이 되어버려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이 실제 발생하니 취업준비생들은 이마저도 경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외모’는 노력으로 쉽사리 변하지 않는 것, 그러니 과학(?)에 의지할 가능성은 당연히 높아졌고 이와 비례하여 부모의 돈은 자꾸만 호출된다.


지난 2004년 ‘스펙’이란 단어가 국립어학원 신조어가 될 때 등장한 취업세트는 고작(?) 3종이었다(학벌, 학점, 영어점수). 이 시절에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 그나마 ‘고등학교 때 좀 더 투자하지 않은 것’, ‘대학 때 자신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은 것’ 정도의 차원에서 이루어졌겠지만 지난 십년간 취업세트는 3배로 진화했다. 그만큼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 난지가 더 중요해졌다. 고난을 극복한다는 건 인간으로서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일 수 있겠으나 그 임계치를 넘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헬조선’이란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B는 현재 졸업한지가 2년이 지났지만 취업하지 못했다. 작은 가게라도 하나 해볼까 하지만 집안형편이 그 정도가 아니라서 또 부모를 원망스러워 하고 있다. B는 부모의 도움으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평점 4.1로 졸업을 했지만 세상은 다른 것들도 요구했다.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행정기준으로는 명백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청년이 부모의 ‘중산층 정도에 불과한’ 재산 때문에 겪게 되는 삶의 좌절은 결코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건 극도로 가난한 자들만의 경로였지만 이제는 가난하지 않게 자란 자들도 가난해지게 된 세상이다. 부모의 힘은 자녀의 삶을 탄탄하게 만드는데 있어 언제나 중요한 변수였겠지만 지금은 ‘정말로’ 막강해졌다. 앞서 등장한 B의 부모는 자녀의 대학재학 기간 4년간 등록금 4천만 원, 생활비 2천만 원을(그래봤자 한 달에 50만원도 되지 않는다. 휴대폰 요금, 학원비 등을 제외하면 밥값, 교통비 수준에 불과함) 지원했지만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해 준 것 없는’ 부모일 뿐이다. 5억짜리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가난이 죄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보다 경제적 형편이 좋지 못한 수많은 가정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열심히 산다고 ‘엄청난 부자의 삶’이 보장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빈곤하지 않음’을 목표로 삼을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앞서 등장한 A가 그랬다. 그런데 이 참을만한 불평등이 참을만한 수준을 넘겨 버렸다. 보다 나은 삶을 향한 개인의 여정이 다시금 ‘태어날 때의 조건’ 앞에 막혀버린다.


통계수치는 이런 변화를 그대로 드러낸다. 통계청의 <2015년 사회조사 결과>을 보면 “평생 노력을 하면 본인 세대에게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21.8%만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문제는 10년, 100년이 아니라 불과 6년 사이에 그 낙하 폭이 상당하다는 것이다(2009년 35.7% → 2015년 21.8%). 이는 개인이 삶의 불안에 대한 공포를 보다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음을 뜻한다. “생각해보니,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도의 상황과 “작년엔 재작년보다 엉망이었어. 그런데 올해는 더 나빠졌어”라고 말하는 경우는 전혀 같은 상황이 아니다. 후자의 개인들에게는 ‘그래도 나아지겠지’라는 긍정성이 없다. 이는 고스란히 ‘내 자녀 역시 괜찮아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측으로 나타난다. 2009년에는 48.4%가 그래도 자녀들은 노력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했지만 2015년에는 그 수치가 31%로 줄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현재의 객관적 상황이 반영된 결과다. 한국사회에서 빈곤층이 중산층 이상이 되는 경우는 22.5%에 불과하다(보건사회연구소, 2014년 기준). 빈곤한 사람 4명 중 1명도 계층상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사가 시작된 2006년에는 32.4%였는데 급락했다. 20~40대만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2012년 기준), 이들 중 한국사회를 ‘한번 실패하면 다시는 일어서기 어렵다’ 응답한 경우가 64.4%였고 ‘노력한 만큼 보상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경우는 75.5%, ‘부모의 지위에 의해 자녀의 계층 상승 기회가 닫혀 있는 폐쇄적 사회이다’는 78.8%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초중고 학생들의 부모님들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학부모 1500명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니 성공이나 출세의 요인으로 ‘학벌과 연줄’을 꼽은 비율이 2006년 33.8%에서 2008년 39.5%, 2010년 48.1%로 매년 급증하고 있는 것은 ‘날이 갈수록’ 한국사회가 절망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런 상황은 한국사회에서 중산층이 되는 것도 힘들어지는 현실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1990년만 하더라도 전체의 75% 중산층이었다. 그리고 진입장벽이 도전불가의 수준도 아니었다. 당시의 중산층 가구의 가장은 ‘고졸, 기혼, 평균가구원 4, 홑벌이’가 평균치였다. 그리고 평균연령이 38.2세였다. 하지만 2013년도에는 중산층 비중이 전체의 67.1%로 과거에 비해 줄었다. 이것도 소득범위를 너무 넓게 잡아서 그런 것이지 실제 자신을 중산층에 속한다고 느끼는 '체감 중산층'의 비율은 46.4%에 불과하다. 자격도 달라졌다. 대학졸업은 기본이며 중산층 평균 가구원 수도 3.4명으로 줄었다. 자녀를 두 명이상 양육하면 평범하게 살기조차 힘들어져다는 말이다. ‘맞벌이’가 기본이고 평균연령은 48세였다. 이는 40대가 넘어서도 중산층에 되지 못한 가구가 과거보다 늘었음을 의미한다. 중산층의 자격이 ‘상향조정’되었으니 한 사회의 빈곤탈출이 그만큼 힘들어졌음은 당연하다.


숫자들이 말하는 바는 명백하다. 이 사회는 일을 해도(working) 가난하다(poor). 그렇게 ‘지금’은 ‘과거’보다 더 지옥이 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 리처드 세넷 등 여러 사회학자들이 이런 사회를 ‘생애에 대한 기획이 불가능’한 시대라 한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먹고 사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가 대학‘까지’ 나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일자리를 구해도 일한만큼 벌지도 못하고 ‘정년’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정년을 다 채워도, ‘오래 살게 된 덕택에’ 노후불안에 대한 공포는 심해졌다.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했는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런 전 세계의 특징이 한국에서는 ‘더’ 심하게 드러난다. 괜히 ‘신자유주의가 한국에 가장 잘 착륙했다’고 하겠는가. 흔히들 자본주의 사회를 ‘정글’로 비유한다. 그러나 탈출구라도 존재하는 곳과 이조차도 찾기 힘든 곳은 ‘같은’ 정글이 아니다.


다시 주택문제로 가 보자. 주택문제는 B와 같은 ‘중산층 가정’에서도 손 쓸 도리가 없다. 2014년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가격 3억 3천 849만원은 도시근로자 평균소득을 6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치 모아야 하는 수치다. (물론 그렇게 6년을 모아도 절대 살 수 없다. 그 사이 집값은 임금노동자의 소득인상분보다 훨씬 가파르게 오르지 않겠는가.) 자본주의 사회 어디를 가더라도 집값이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무슨 저택에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24평형 아파트 전세 얻는데 저만한 금액이 드는 것은 상식이 아니다. (그리고 저 금액도 서울의 평균일 뿐이다. 서울 강남구, 서초구 쪽에는 24평형 아파트 전세가격이 8억이 넘는다.) 그리고 다른 모든 ‘나쁜’ 수치가 ‘나빠지는 것’처럼 이 가격도 악화일로다. 2004년에는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가격이 1억 5,432만원이어서 그래도 4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저축하면 될 일이었는데 말이다. 소득을 모두 저축한다는 비현실적인 계산에서도 이 정도인데, 실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세가 아니라 ‘주택매입’을 기준으로 주판을 두드려보면 이건 거의 절망이다. 소득분위를 5분위로 나누었을 때, 가운데인 3분위에 해당하는 사람은 기본적인 지출을 제외하고 1년에 평균 797만 4천 원 정도를 저축한다. 그렇게 27년을 성실히 살면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2억 1,677만원), 43년을 살면 수도권에서(3억 4,700만원), 그리고 59년을 살면 서울에서(4억 7,000만원) ‘평균’에 해당하는 주택을 마련할 수 있다. 어디 이것뿐인가. 검색 몇 번만 하면 불명예스러운 통계지표에서 독보적으로 ‘OECD 1위’를 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민낯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다. 노력할 근거가 없고 도둑질이나 사기 치지 않는 이상 희망이 없는 사회에서 충분히 있음직한 일 아니겠는가.


“왜 4년 만에 졸업을 하지?”라고 묻는 시대의 등장


지금의 청년세대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특이한 현상 하나를 이해해보자. 졸업을 안 한다는 뜻의 ‘NG족’(No Graduation)은 이미 보편적인 시사용어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영화촬영장에서 외쳐대는 “NG!”(No Good)와 발음이 같은데 원래사용시의 뜻과 너무나도 어울릴 정도로 NG족은 부정적인 세태를 대변한다. 지금까지 대학생활의 기간이 연장되는 지점이 사회적 관심이 된 것은 군대문제와 상관없이 휴학을 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든지, 반수를(대학을 다니면서 수능재수) 선택하면서 야기되는 자퇴생의 증가 정도였다. 졸업논문을 쓰지 않거나, 영어시험 점수를 제출하지 않거나, 교수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멀쩡한 학점 하나를 F처리해서 졸업조건을 고의적으로 누락시키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졸업유예는 일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NG족이 2006년도 ‘올해의 신조어’로 여러 언론매체에 등장했을 만큼 졸업유예는 2000년대 중반이후의 ‘암울해진’ 대학생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다.2013년 12월 12일자 <한국대학신문>이 국회 교육과학문화관광위원회 박성호 새누리당 의원이 공개한 ‘대학별 졸업생 등록학기 수 현황’ 자료를 바탕으로 보도한 “서울대도 피해갈 수 없는 ‘취업한파’ - 인문대 졸업자 절반이 10학기 이상 등록한 ‘5학년생’” 기사를 보자.


1. 올해 서울대 졸업자 3495명 가운데 10학기 이상 등록한 학생의 비율은 34.1%(1192명)에 달했다. 이는 2009년 25.2%(979명)보다 5년만에 8.9%p나 증가한 수치다. 단과대별로 인문계열 ‘5학년생’ 비율이 자연계열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아 취업난을 실감케 했다. 인문대가 2009년 34.3%에서 2013년 49.8%로, 사회대가 30.6%에서 41.3%로, 경영대가 32.8%에서 46.7%로 급증했다. 반면 공대(29.2→28.0%)와 자연대(26.2→26.8%)는 ‘5학년생’의 비율 변화가 거의 없었다. 9학기 등록자 현황을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인문계열 단과대학의 경우 거의 80%에 육박했다. 2013년 졸업자 가운데 9학기 등록자 비율은 법대(79%)가 가장 높았고 이어 인문대(77.9%), 경영대(77.4%) 순이었다. 공대(54.1%)와 자연대(48.7%)는 절반가량이 4년 반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2. 29학기로 좁혀보면 전체평균이 59.7%이며 인문대, 경영대 등은 “남들 다 하니까” 유예한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자연대, 공대에서나 “아직 절반은 유예 안 해”라고 자조가 허락된다. 물론 이는 대학 전반적 풍토다. 이화여대는 53%, 연세대는 46%가 9학기 이상을 등록하고 졸업한다. 서강대의 경우 졸업자 중 유예자 비율이(2011년→2013년) 인문학부(42→57%), 사회과학부(42→50%), 경제학부(32→53%), 경영학부(31→43%), 커뮤니케이션학부(40→63%) 등으로 확인되었는데 이런 수치들을 종합하면 전체 대학까지는 아니지만 ‘서울권 일부대학은 이미 유예비율이 절반을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인문계열이 더 높은 이유는 당연히 취업문제가 타의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이는 스펙관리를 더 철저히 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데 복수전공으로 경영학 계열까지 선택해서 공부해야 하는 상황은 절대적인 시간 개념에서 8학기가 부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졸업을 위해 필요한 120~130학점 중 100학점 정도를 전공과목으로 취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학교 다니면서’ 할 수 있는 건 학점관리와 토익시험 응시 정도다. 재학기간 중 2~3학기 정도 가능한 휴학을 어학연수, (취업용) 봉사활동 등에 활용하 공모전 응시 및 자격증 취득을 하기 위해서라도 ‘졸업유예’는 당연해진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5년 만에 졸업하면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걱정했지만, 요즘은 4년 만에 졸업하면 '왜 4년 만에 졸업하지?'”라고 묻는 시대다. 고용정보원의 <2015년 4월 고용동향 브리핑>을 보면 전체 대학생 중 휴학 없이 졸업한 사람은 30.9%에 불과했다. 나머지 69.1%는 휴학과 유예 등을 통해 어떻게든 졸업을 연기한다. 평균 졸업기간이 남자의 군복부 기간을 제외하고도 5.2년이다. 누구든지 평균 1.2년을 ‘더’ 대학을 다닌다. 사실상 ‘모든’ 대학생이 휴학을 하고 ‘상당수’가 졸업유예를 하는 시대다.


지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졸업유예가 대수겠는가


별 다른 고민을 하지 않아도 이유를 추론하는 건 어렵진 않다. 일을 해도(working) 가난한(poor) 시대에는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중요하다.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를 따져야하고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를 고려해야 한다. 이와 비례하여 전체의 학력상승이 나타나지만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만 적체된다. 투자한 비용을 고려하면 쉽사리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수도 없다. 이건 눈이 높아서가 아니라 ‘다른 쪽’이 워낙 엉망이기 때문이다. 이제 청년의 문제를 ‘예전에도 그랬다’는 식으로 생애사적 위기의 차원에서 쉽사리 규정할 수 없다. “기성세대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 그와 별반 관계없이 그들의 자식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지금은 엄청나게 사교육 받아 이름 있는 대학을 가서 학기를 초과하면서까지 취업을 준비한다. 너무나도 비정상적이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바탕으로 ‘비정상화의 일상화’가 가능한 이유를 살펴보자.


1980년대에는 중소기업 노동자들도 대기업 노동자 임금대비 97%의 수준의 소득을 보장받았다. 이것이 1994년에는 77%로 떨어졌고 2014년에는 60%까지 급락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적용되지 않는 나라이니 대기업과 동일한 대우를 기대할 순 없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는 감당할만한 수준이어야 한다. 대졸 신입사원 월급이 300만원이 경우와 180만원인 경우는 그렇지 않다. 중소기업을 가는 것이 곧 삶의 질이 추락됨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 존엄성의 문제다. 그런데 현재 전체 노동자의 81%가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일자리를 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10명 중 ‘2명’에 포함되어야 하는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단지 임금만 차별 받는 게 아니다. 대기업의 경우 국민연금 가입률이 95%가 넘지만 중소기업은 64.1%에 불과하다. 한국사회에서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는 건 현재는 물로 노후까지 불안함을 예약하는 꼴이다. 유급휴가 역시 대기업은 93.4%가 혜택을 보았지만 중소기업은 44.4%만이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다. 휴가를 쓰는 만큼 월급이 깎으니 제대로 쉴 수도 없다. 2%에 불과한 중소기업 노동조합 조직률을 볼 때 문제가 있다고 어디에 하소연도 못한다. 쉽게 말해, 지금의 대학생들이 대기업을 고집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일종의 ‘생존본능’이다.

여기에 비정규직 문제까지 고려하면 ‘대학생들의 졸업유예 전략’은 쉽게 이해된다. ‘임금이 낮은’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임금이 낮은’ 비정규직이 될 바에는 다른 기회를 엿보기 위해 ‘강의도 듣지 않으면서 대학에 돈을 납부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사회마다 여러 이유가 중첩되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구분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임금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비정규직’은 쉽사리 인정할 만한 수치가 아니다. 이들의 월평균 임금 149만 7천원은 정규직 대비 55.8%에 불과하다. 이 수치도 정부통계이고 노동자 통계에 따르면 2014년부터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대비하여 절반도 되지 않는 49.9%의 급여를 받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과 비교하면 40%밖에 되지 않는다. 대기업 대졸신입사원 월급이 300만원이라면 120만원 받는 셈이다. ‘밥만 먹고 살라’는 뜻이다. 그 차이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2002년도에는 정규직이 100만원을 받을 때 비정규직은 67만 1천원을 받았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상황이라 다들 그랬는데, ‘더’ 나빠졌다. 그래서 노동자 중위계층 급여의 3분의 2 이하로 급여를 받는 ‘저임금자 비율’도 비정규직 정규직 노동자에서 압도적으로 높다. 2015년 기준으로 정규직 1062만 명 중 저임금 종사자는 70만 명인데, 비정규직 노동자 868만 중 402만 명이 저임금 노동자다. 미래마저 어둡다. 한국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율이 매우 낮다. OECD 16개 국가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비정규직으로 채용된 3년 뒤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율이 22.4%에 불과해, 평균 53.8%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정규직으로 전환은 커녕 해고되기 일쑤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으로 채용 3년 내 해고될 확률이 26.7%인데 이는 평균 16.9%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비록 비정규직이라도 ‘나중에’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크고, 해고될 가능성은 낮다면 대학생들은 졸업유예보다 ‘어디든 취업부터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니다. 정규직에 비해 6분의 1 수준인 비정규직의 노동조합 가입현실을 고려하면 중소기업의 경우와 마찬가로 문제가 풀릴 여지도 없다. 그러니 8학기가 끝나갈 때, 구직성과가 좋지 않으면 ‘취업준비생’ 신분을 더 늘려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봄직 하다.

불안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국가가 ‘공기업’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2010년 이후 4년간, 한국의 30대 공기업에서 정규직은 1.2%, 비정규직은 12.4% 증가했다. 이는 국가가 앞장서서 고용의 풍토를 ‘비정규직화’ 하겠다는 의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니 일반기업이 “더 이상 해고할 정규직이 없는 상황”인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말 그대로 ‘헬조선’이다. ‘지옥에서 살아남고자 하는데’ 졸업유예가 뭐가 대수겠는가.


의심하라! 그것은 신(神)이 선사한 사람의 권리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제도적인 도움을 바탕으로 언급된 ‘나쁜 지표’들이 좋아져야 한다. 제도적 도움을 넓은 의미에서 정책이라고 본다면 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물론 정치인들이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겠지만 그 정치인이 ‘대변하는’ 민심은 결국 개인이 평소 어떤 여론을 생산하기 위 노력 했는가와 무관치 않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늘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일상에 대한 문제제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비판적’으로 살아간다는 게 한국사회가 만만치 않다. 특히! 종교는 이를 무슨 죄악처럼 여긴다.


‘비판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바로 신이 직접 만드셨다는) 인간의 ‘자격’이다. 인간은 침팬지와(심지어 ‘쥐’하고도) 유전자의 99%가 흡사하다. ‘다른’ 1%는 바로 이성의 유무다. 이성은 언어를 만들고 추론능력을 만들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배양한다. 그래서 인간만이 ‘공동체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본능을 억제한다. 그렇기에 인류는 “시행착오를 줄이며 생물학적 진화와는 비교되지 않는 엄청난 속도로 사회적 진화를” 할 수 있었다. 사회학자 김찬호는 『사회를 보는 논리』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의 특징을 설명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지적인 호기심이 매우 강렬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생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끊임없이 뭔가를 새롭게 알고 싶어 한다. (…) 인간은 주어진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 속에서 문화를 발전시켜온 것이다. 질문할 수 있는 능력! 바로 이것이 인간 진화의 비결이다. (…)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삶과 사물의 이치를 되묻는 작업만이 아니다.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제기되고 내게 던져진 질문 그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단계로도 나아가야 한다. 오답도 문제지만 오문(誤問), 즉 잘못 던져진 질문도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내게 던진 질문에 대해 과연 그것이 정당하고 필요한 질문일까하고 물음표를 달아보는 태도가 요구된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실 타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진 질문도 우리를 구속하지만, 스스로 던진 질문 가운데도 잘못 던져진 것이 얼마나 많은가. (….) 질문 자체에 질문할 수 있는 힘, 그 지적인 에너지로 우리는 생각과 삶의 자유를 확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이란 걸 이해해 보자.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든 동물들은 ‘불’을 무서워하고 피한다. 본능에 충실한 반응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를 영리하게 사용했다. 직접적 위협을 가하는 경우를 제외하니 ‘불’은 무궁무진한 효용이 있었다. 음식에 ‘가열’하면서 더 건강해졌고, 그래서 수명이 연장되니 ‘미래를 위해서 현실을 희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인간은 ‘불’을 적의 위협을 막아내는 도구이자 공부를 위해 어두운 밤을 밝히는 빛으로 응용했다. 때론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서로간의 갈등을 씻기도 하고 ‘촛불시위’때는 강력한 사회적 저항의 무기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 ‘불’을 아주 거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해보자. 인간은 그 고정관념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깨부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인간을 “신이 정해준 운명에 도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유일한 동물”이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삶 안에는 언제나 ‘갈등과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성장통’을 바탕으로 인류는 전진한다.


‘확신하지 않는 자세’를 인간의 ‘능력’으로, ‘자격’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언제나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명심하길 바란다. ‘집단사고’(group thinking)는 미국의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의 개념이다. 재니스는 미국의 케네디 정부가 쿠바의 피그만을 무력 침공했다가 혼쭐난 사건을 통해 ‘아무리 지성들이 고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집단의 결정은 ‘멍청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미국은 자기 바로 앞에서 사회주의 깃발을 보란 듯이 꽂고 있던 쿠바가 눈에 가시거리였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쿠바를 어떻게든 해결(?)할 방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CIA는 무력으로 침공하여 내부갈등을 통한 체제개혁이 가능하다는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물론 쉽사리 실행에 옮길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젊음’을 무기로 한 ‘케네디 정부’는 자신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이 카드를 사용하기로 한다. 백악관 회의실에 미국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를 했고 사실상의 만장일치로 ‘피그만 침공’을 실행에 옮긴다. 이들은 ‘우리처럼 잘 나가는 집단에서’ 오류를 범할 리 없다는 ‘극단적 낙관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완벽하게 실패한다(1961년). 작전에 참가한 1400명 중 1200명이 ‘생포’되었고, 미국정부는 이들을 돌려받기 위해 쿠바에 5,300만 달러 수준의 물자를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작전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미국정부는 만약 문제가 될 때,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빌미를 만들기 위해, 1400명의 요원들을 ‘쿠바망명자’로 구성했다. 여기서 일차 문제가 발생했다. 과테말라에서 훈련을 한 이들은 시작부터 불안해했다. ‘왜 미국인들은 여기에 없는 거지?’라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 등장했고 이는 ‘잘못되면 우리 모른 척 하는 것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으로 이어졌다. 작전이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자 대다수가 즉시 ‘항복’을 선택한데에는 이런 불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 다른 실수는 미국정부가 ‘쿠바’라는 국가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쿠바’는 엄연한 ‘국가’의 틀을 탄탄히 갖춘 나라다. 이런 ‘쿠바’를 사실상 비(非)정예요원을 투입시켜 ‘전복’시킬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쿠바가 무슨 ‘부족단체’란 말인가? 그리고 ‘무려’ 1400명을 투입시키면서도 내부분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과 그리고 ‘고작’ 1400명을 가지고 무력침공이 성공할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한 명의 독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답게 케네디정부는 열심히 토론을 했다. 그러나 ‘결속력이 너무나 강한 것’이 문제였다. 정당한 비판이 ‘우리가 과연 실수할 것 같아?’라는 반론에 막히고 합리적 의심을 ‘너 겁쟁이구나?’라는 조롱하는 곳에서 ‘옳은 결정’이 등장할 가능성은 낮다. ‘집단사고’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과 비교되는데, 후자는 다수의 의견이 ‘모여’ 보다 지혜로운 결과물이 창출됨을 뜻한다. 하지만 집단이 모였다고 ‘지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어도 그 집단이 추구하는 목적과 이를 달성위한 과정의 철학이 어떤가에 따라 그 결과는 최악일 수 있다.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이 문제를 더 무게감 있게 이해해야 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결속력이 높을수록 집단사고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볼 때, 한국사회는 이 ‘결속력’이라는 것의 이미지가 매우 신성하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가 그렇다!) 조직의 치부를 드러내는 ‘내부고발자’를 ‘고자질쟁이’ 정도로 취급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 것은 한국사회가 ‘결속력’에 대한 과잉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는 증거다. 전체를 위해 개인의 당연한 권리를 희생하는 것이 한국처럼 ‘미덕’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당연한 요구’가 ‘이기주의’로 오해되기 쉽다. 결국 ‘논리’와 ‘상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집단의 가치’가 늘 추종될 가능성이 높고 이런 사회는 ‘집단사고’는 구조적으로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비판적 사고’를 일단 ‘내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한 다음’으로 고려하는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비판’을 추후개념으로 미루게 될 때, ‘현실성’이라는 덩어리는 집요하게 개인의 일상을 지배한다. 그 결과는 ‘영원히’ 먹고사는 문제에만 개인을 집중시키는데, 좀처럼 이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설사 추후에 ‘여유가 있는 삶’이 있다 하더라고, 이미 그때가 되면 ‘비판’은 매우 어색한 개념이 되어 있다. 비판적 사고, 그건 ‘이성’에 충실한 지극히 인간의 자격이자, 나아가 자신이 동물과 다른 인간임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오늘의 지혜가 내일의 어리석음이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언제나 당신의 믿음을 의심하길 바란다(Suspend Your Belief!). “인류가 성인이라 칭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기성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혁명성”이었음을 기억하자. 신이 인간을 그렇게 ‘동물과 구별되게’ 만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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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윤실

2016년 기윤실 회원총회+신년강연회

양극화를 넘어 더불어 함께 


불편하게, 즐겁게, 더불어 함께 만드는 기윤실 (총회후기) 



회원총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총회 시작 3주전부터 회원님들게 한 분 한 분 전화를 드리고, 문자와 이메일까지 꽤 귀찮으실 정도로 보냈습니다. 문자와 이메일로 참석을 알려오시는 분도 계셨고, 가고 싶지만 고령의 나이로 참석이 불가하시다면 마음으로 함께 해주시겠다는 귀한 연락도 왔습니다. 


드디어 당일. 아침부터 분주한 마음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고 오랜 동지 서울영동교회로 출발. 핸드메이드 데코용품과 박제민 간사님이 친환경 유기농으로 엄선한 간식들이 차려지고 있는 중에 아뿔사! 가장 중요한 가부표(총회 안건에 대한 의결 표시 물품)를 사무실에 두고왔습니다. 두둥... 다행히도 시간이 있어 베스트드라이버 김효준 간사님께서 쏜살같이 다녀오신 덕분에 무사히 가부표를 나눠드릴 수 있었습니다. 


소풍가는 고양이(식사업체)가 배달해준 따뜻하고 소박한 식사를 하면서, 지역에서 오신 분들 오랜만에 만난 회원분들과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이후 총회가 시작되고 여느때와 다르게 화기애애한 회의. 홍정길 이사장님의 특유의 유머러스한 진행은 참석하신 회원분들의 웃음과 즐거움을 이끌어 내시기도 하셨지요. 


편안하고 즐거운 회의 분위기가 진행되면서, 회원분들은 평소 기윤실 운동에 대한 생각을 여러가지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무슬림과 동성애 문제, 또 본질적으로는 기윤실 사명과 관련된 의견들을 개진해주셨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외부회계감사를 맡고계신 이천화 회계사님(가립회계법인)과 이상민 변호사님(법무법인 에셀)이 참석해주셔서 직접 감사 발표를 해주셨습니다. 





총회 이후, 임성빈 공동대표님은 "양극화 해소와 기윤실 운동"을 주제로 발제를 해주셨는데요, 세계의 부의 양극화 현상과 특히 우리나라 청년들이 겪는 세대 간 양극화 문제에 대한 지표를 통해 양극화 현상의 심각성을 빅데이터로 정리해주셨습니다. 아울러 기윤실이 사회 속에 목회 현장으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문제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실천적 방안을 통한 해결에 대하여 제안 해주셨습니다.
 


2016년 기윤실이 하려는 가장 중요한 운동은 양극화 해소인데요, 이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양극화로 인해 안보이는 곳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발견해주고, 목소리를 잃은 이들에게 귀 기울여 주는 것 길에 더불어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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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윤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