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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② - 백소영 교수(이화여대, 기독교사회윤리학)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②


※ 이 글은 5월 8일, 평화다방에서 진행된 토론회 원고를 편집한 것입니다.


발제 2.

소수자와의 갈등을 넘어서기 위한


교회와 기독시민의 역할

백소영 교수(이화여대, 기독교사회윤리학)




1. 촛불과 탄핵,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 표출된 갈등,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보기

우리 집도 예외 없었다. 인품 좋은 분들이고 사는 동안 크게 언성을 높여 싸울 일이 없었던 친정 부모님과도, 시댁 부모님과도, 여지없이 한판 붙었다. 계기는 촛불집회에 아들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찍은 인증샷 때문. 이후 시어머님은 태극기 집회를 빠짐없이 참석하시며 인증샷을 가족 단톡방에 올리셨다. 이 일을 계기로 양쪽 어르신들의 연대가 급격하게 두터워졌다. 남과 북으로 나뉜 이 슬픈 나라에서 이젠 가족 간에도 양분되는 가슴 아픈 갈등을 보며 “세대 차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발제는 전상진 교수님께서 진행해주실 터라, 나는 같은 현상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풀어보려 한다.

‘여성주의’는 현 체제 밖의 시선이고 사유이고 언어이다. 모든 ‘여성’이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 해도 가부장제를 관통하면서 남성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과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고 순응했다면, 아니 오히려 적극 가담해서 한 자리 차지했다면 그녀들은 ‘여성주의자’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되 은유로는 ‘남성’이다. 때문에 ‘여성주의적’이라는 말은 생물학적 ‘여성’이나 구성적 특성으로서의 ‘여성성’과 반드시 일치하는 단어는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시스템 안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떤 것, 새로움을 가져올 수 있는 ‘시스템 바깥’의 의미이다. 도전적이고 진취적이고 경쟁해서 승리하는 ‘남성’이 지도자의 자질을 갖는 ‘약육강식’의 동물적(실은 동물이 더 낫다. 배고프지 않은데도 잡아먹는 건 인간사회뿐) 시스템이 21세기 신자유주의적 고용유연성의 관료제적 자본주의와 만나니 체제 밖으로 배제된 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게 되었다. 현재 ‘남근중심적’(공격적, 경쟁적, 이성적, 효율적, 기능적, 개별적 혹은 조직이기주의적) 사회구조는 사다리의 제일 꼭대기에 자리를 차지한 소수가 권위를 독점하고 자기들 아래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과 종류와 속도, 그리고 죽음까지도 좌지우지하고 있다. 오천 년 가부장 역사 가운데 가장 대규모로 가장 지속적으로 시스템 안에 있으나 그 시스템을 만드는 데 참여한 바 없고 그 시스템 안에서의 자기 위치 역시 스스로 결정한 바 없었던 여성들이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주의’를 “여성주의”라고 부른다면, 시스템 바깥에 배제된 남성들도, 그리고 다른 소수자들도 포함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이름을 달리 부를 수도 있다. ‘보편주의’ ‘평등주의’ ‘無/脫 계급주의’・・・ 그러나 이제껏 공적 테이블의 합의와 결정방식에 자신들의 의미가 반영된 바 없었던 ‘소수자들’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대변하기에 “여성”만큼 적절한 이름이 또 어디 있을까.

 


2.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체의 답

추운 겨울부터 봄까지 광장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은 마주보기를 원했다. 계급장 떼고, 성별 떼고, 나이 구분 떼고, 모두가 한 시민으로서 자신의 의미를 전하는 일을 축제처럼 즐겼다. 어이없는 일은 이를 위협으로 여긴 사람들이 비단 위계적 리더십을 독점한 상층부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권력도 부도 가지지 않은 ‘어르신들’은 촛불 정국을 낯설어 했고, 나아가 불안해했다. 소위 6.25세대라는 그들의 공동기억도 한몫 했을 일이고, 산업화 세대라는 그들의 ‘업적’이 부정당하는 느낌에 대한 분노였을 수도 있다. ‘우리’가 (살기 좋게) 만들어놓은 이 시스템을 부정하고 뒤흔들다니! ‘어르신들’의 분노는 그들이 성취했고 정당하다고 믿는 위계가 전복된 것(혹은 될 것)에 대한 불안감이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통치자와 시민(거의 ‘신민’), 고용자와 노동자 사이를 ‘위계’로 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빠짐없이 ‘태극기’쪽에 섰다. 어디 ‘감히’ 시민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리나. 이들은 이미 ‘정답’을 가진 집단이다. 도대체 탄핵 정국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동성애 이슈가 불거졌을 때에도 이들은 목소리를 합하여 이성애를 정답으로 외쳤다. 사람들의 관계 방식에 위계가 존재한다고 믿고, 정답을 가진 쪽이 ‘자신들’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래서 ‘다름’이 드러나거나 답이 달라질 수 있는 열린 토론이 불편하고 불안한 이들이 인정하지 않는 공간은 다름 아닌 ‘사이’ 공간이다. 너와 내가 ‘n분의 1’의 권위를 가지고 마주본 채, 서로의 ‘다름’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서로 의미 있게 마주본 둘이라면 결국엔 중간지점이든 전혀 다른 답이든 함께 할 수 있는 답을 찾아갈 수 있는 관계적 혁명의 공간. 그 ‘사이’를 가져본 적 없는 이들은 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고 응시했던 이들의 의미 표출에 분노하게 된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다. 우리는 내일 있을 투표 결과에 승복하며 내가 뽑은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다수’의 의사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의사 결정이 있기까지 우리 사회구성원의 목소리들을 가능하면 ‘모두’ 마주하는 과정은 필요하다. 내 답과 다르다면 갈등하는 과정도 ‘악’이 아니다. ‘소수자’ ‘약자’라는 말은 반드시 수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심지어 그 수가 많더라도 공적 결정과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 그들의 의미가 들려진 적도 반영된 적도 없었다면, 그들은 ‘소수자’요 ‘약자’다. 그동안 순종적이고 말 잘 듣던 딸이요 며느리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언성을 높인 일이 공동체의 파괴요 인륜을 저버린 행동이라 여기는 한, 우리는 결코 ‘구성원이 모두 행복한 공동체적 살기 방식’을 향해 근접해 가기 어려울 것이다.


 

3. 잃은 양 한 마리까지도 품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기

안타까운 현실은, 가장 작은 자의 의미까지도 살뜰하게 품어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는 기독교인들이 이 엄청난 갈등의 주요 진원지라는 사실이다. 지인이 태극기 집회의 사진을 찍어 보내며 왜 저기에 미국 국기와 심지어 이스라엘 국기까지 있느냐는 질문에 그걸 설명하느라 애썼던 기억이 있다. 역사적 우연성으로 결합되었으나 비본질적인 ‘패키지’는 해체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잃은 양 한 마리까지 기어이 찾아와 공동체에 포함시키는 그 사랑은 어찌 닮으려하지 않는지.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 나라는 믿으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작고 힘없는 사람들의 의미에는 왜 귀 기울이지 않는지. 예수는 가부장제와 제국이 만들어 놓은 권위의 위계가 정점에 달해있던 시절에,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서로 마주보는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고 사신 분이다. 그 관계적 혁명을 이룬 공동체가 ‘교회’인데, 어쩌자고 오늘날의 교회는 또 다시 가부장제와 제국의 위계를 닮아가나. 아니, 오히려 더 앞장을 서나. “네 말이 옳도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당시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작고 작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옳다하시고 그들의 삶의 해석을 받아들이신 예수를 ‘주’로 믿는다면, 소수자·약자와의 갈등을 넘어서기 위한 기독 시민의 첫 역할은 자명하다. 나와 다른 답을 가진 이들을 초청하고 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의 의미를 듣는 일! 단 한 번도 방해받지 않고 내 이야기를 끝까지 해보지 못한 사람들(내가 실재요 은유로서의 ‘여성’이라고 말한)에게 마이크를 내어주는 일, 그것부터 시작해야한다. 그 추운 겨울에 손을 호호 불면서도 발랄하게 무대 위로 뛰어올라왔던 어느 이름 모를 초등학생, 아기 엄마, 노점상인, 그들이 의미가 충분히 들려지고 제도와 정책에 반영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것이다. 안정, 성장, 효용성... 이런 이름으로 생명을 버리는 제도와 정책은 ‘반(反)하나님적’이다. 그러니 교회의 이름으로, 신자의 이름으로 싸워야하는 것은 이제껏 교회의 공적 담론이나 교리에 반영된 적 없었던 소수자나 약자의 ‘낯선 의견들’이 아니다. 싸워야할 무리들과 연대를 하고, 듣고 품어야할 이들에게 칼을 빼드는 어리석음은 이제 그쳐야하지 않겠는가.



2017/06/08 - 새로운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 손봉호 자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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