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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실 25주년 기념 윤리부흥회] 박은조 공동대표 말씀

"이웃을 위한 자발적 불편"
기윤실 25주년 기념 윤리부흥회 말씀

박은조 공동대표(은혜샘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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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위한 자발적불편”

기윤실 25주년 기념 윤리부흥회 말씀
박은조 공동대표(은혜샘물교회 담임목사)

● 제목 : 하나님의 일꾼
● 본문 : 마태복음 11:28-30

사무처에서 제게 기윤실 윤리부흥회 설교를 부탁하는 연락이 왔을 때 느낌이 참 이상했습니다. 그냥 부흥회 설교하러 오라는 말과 윤리부흥회 설교하러 오라는 말이 그렇게 큰 차이가 날 줄은 몰랐습니다. 평소 생각으로는 성경 말씀을 배우는 것이 윤리 그 자체라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윤리 부흥회입니다‘라고 요청이 오니 선뜻 간다는 소리를 못하겠더라고요. 사실 손봉호 장로님이나 홍정길 목사님이 와서 앉아 계실 걸 알았으면 그 때 더 안온다고 했어야 했는데 일정을 펴보니까 올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1년동안 기윤실 공동대표를 맡으라고 해서 맡기는 했지만,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해 이것까지 못 간다고 하기에는 너무 죄송해, 간다고 얘기해 놓고 난 다음에 바로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습니다.

샘물교회를 시작하고 2-3년 지나서 교회가 조금 안정이 되고, 한 2-3년 지났을 때 사무 간사로 섬기던 팀장이 저한테 얘기했습니다. 목사님의 평소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 교회 컴퓨터에 들어있는 소프트웨어를 정품으로 전부 바꿔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의 표정이 제가 당연하게 ‘그렇게 해야지’라고 말 할 것을 기대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맞아 해야지 근데 돈이 굉장히 많이 들텐데‘, 그때 제가 주저주저하는 제 마음의 느낌을 나이도 어리고 제 설교를 듣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얘기하는 형제한테 제가 위장을 하느라고 상당히 힘이 들었었습니다. 그리고 즉각 그렇게 해야지라는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마지못해서 ’그래 해야지‘ 그렇게 말했던 그 기억이 윤리부흥회하고 딱 연결해서 머리에 떠오르는데 제가 마음이 좀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윤리부흥회라는 표현 때문에 제 자신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나누면서 또 가르치는 입장에 있으면서 또 나 자신이 그 말씀을 붙들고 살면서 윤리라는 말 앞에서 왜 이렇게 떨고 있나? 이게 윤리적이 되기 위해서 불편정도가 아니고 돈도 많이 들어가고, 그리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매사가 그런데 참 그런 교훈들이 떠오르면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교회가 불과 130년 만에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이 더 이상 매력적인 이름이 되지 못하도록 만든 이 잘못은 전적으로 목사, 장로들의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로님들은 빼고 목사들의 죄라고 말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장로님들은 설교를 많이 하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오늘 마태복음 11:28-30절을 읽었습니다마는 자발적 불편운동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윤리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꾼의 기본 중에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지금 이 땅에서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부모세대나 선배들은 분명 이러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만 제가 어릴 때 예수 안 믿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동네 누구를 칭찬하고 싶을 때 우리 아버지가 하던 표현이 “그 삼가에 김 목수 그 사람 경화교회 집사야.” 그렇게 말하면 그건 “그 사람 참 믿을만한 사람이야”, “그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을 때 교회직분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건 우리 아버지 어머니만 그렇게 얘기한 게 아니고 우리 마을 사람들이 다 그렇게 얘기했고, 복음이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조선 팔도에 그런 말이 널리 퍼졌고, 이 말이 한 20-30년 전까지도 살아있지 않았을까 제가 그렇게 회상해봅니다. 그런데 어느 샌가 이 말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언젠가 한 2-3년 전에 기윤실에서 했던 조사가 제 마음속에 굉장히 충격을 주었는데 지금 기억만으로 얘기하는 겁니다만 성도들에게 자기 교회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는다’, ‘자주 받는다’, ‘가끔 받는다’, ‘잘 못받는다’, ‘상처 받는다’ 이런 식의 질문이었는데 ‘가끔씩 받는다’, ‘자주 받는다’, ‘많이 받는다’에 답한 사람이 80%쯤 됐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사람들에게 다시 또 묻기를 우리 목사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어느 정도는 신뢰한다’ 이런 식으로 물었는데 설교에 은혜를 받는다는 사람이 80%쯤 됐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믿는다’, ‘믿을 수 있다’고 대답한 사람이 70%정도 밖에 안 나왔습니다. 제가 그 수치를 보면서 10%가 뭘까? ‘나는 당신 설교에 대해 은혜를 받지만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알겠냐 같이 살아본 것도 아니고…’ 이런 불신이 이미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제가 그 통계를 놓고 혼자서 아파해보았던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일꾼으로 삼으시면서 주시는 가장 중요한 일꾼의 조건은 우리가 이 자발적 불편운동이건,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는 동력을 우리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것인데 그 말씀이 28절에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죄짐이라고 한 마디로 다 표현할 수도 있겠고, 또 죄짐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짊어져야 할 가족을 부양해야 될 짐이며 많은 짐들이 우리에게 있는데 주님께서 항상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 짐을 주님이 먼저 져 주시고 우리의 어깨를 비우게 만든 다음에 그리고 우리에게 나의 멍에를 메라 29절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제1단계, 2단계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의 짐을 져주시고 우리의 어깨가 비고 그리고 우리의 그 빈 어깨가 만들어진 다음에 29절에 보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쉼을 얻으리니.”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1단계, 2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단계까지 오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일까? 이런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면 된 건데 2단계 까지도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하는 심각한 질문이 포함이 되어야 하는가.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얘기한 것을 생각하면 2단계까지 마땅히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내 짐을 져주신 것이 맞는다면 당연히 그 다음단계는 다른 사람의 짐을 주님이 메게 하시는 주님이 보게 하시는 다른 사람의 짐을 주님의 이름으로 짊어지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 이게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삶입니다. 가까이에서는 부부관계부터 시작해서 제일 멀리는 원수까지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의 짐을 우리 주님이 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자발적불편운동이라고 하는 표현자체가 손 장로님께서는 굉장히 잘 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처음에 뭐 이런 걸 하려고 하나 좀 더 근사한건 없을까? 저는 처음에는 이게 너무 좀 지엽적인걸 가지고 이러는 게 아닌가, 좀 통 크게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기윤실이 이런 운동을 꼭 해야 되나, 조금 더 크게 뭔가 도전을 하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작은 것도 못하면서 뭘 큰 걸 한다고, 태산을 뒤엎을 것처럼 그러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태산을 뒤엎을 힘이 전혀 없는,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는 시각 자체가 우리가 뭘 한다고 말도 꺼내기 어려운 이런 상황에서 이런 표현, 우리가 이전에 써보지도 않았고 좀 생경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작은 것부터 우리가 충성스럽게 한 번 섬겨보자. 그런 점에서 이 운동이 참 의미가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발적불편운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는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자발적불편운동은 쉬운 운동이 될 수 있다고 또한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멍에입니다. 이게 부부관계가 그저 서로 좋아서 외롭지 않게 자식 낳고 사는 그건 그리스도인도 비그리스도인도 똑같습니다. 그건 주님이 지워주신 주님의 멍에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멍에는 돕는 배필이 되라고 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인 부부의 삶과 비그리스도인 부부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돕는 배필, 섬기는 배필이 돼라. 그래서 제일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배우자부터 시작해서 가장 멀리 있다고 느껴지는 원수에게까지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되고 돕는 자가 되는데 이게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멍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멍에가 쉽다는 것입니다. 이 멍에가 가볍다는 것입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데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치뤄야 하는 비용도 많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감수해야 될 대가가 굉장히 많은데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쉽다, 가볍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고민스러운 말씀이기는 합니다마는 주님이 말씀하시니 어쩌겠습니까? 그렇거니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실제로는 어렵고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쉽다고 생각하며 자기 최면을 하면서 살라고 주신 말씀이 분명히 아닙니다. 이게 쉽게 될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29절에 나와 있는 표현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을 배우면 쉽고, 주님을 배우지 않으면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짐을 짊어질 때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이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기대하고 나아가면 이 길을 좀 더 쉽게 나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지난 4월에 가이드포스트에 이런 글이 하나 실렸습니다. 미국 오클라호마 주 에드몬드라고 하는 곳에서 교사로 일하는 스테파니 톰슨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 부인이 쓰신 글인데 이런 내용입니다.

사순절 첫날이 되도록 나는 아직도 무엇을 절제해야 할지 결심이 서지 않았다. 전에는 커피나 청량음료, 디저트 등을 자제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사순절 동안 꼭 뭔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개념부터가 내게 진부해 보였다. 그런데 하루는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자원봉사를 하러 가는데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뭔가를 포기하기보다는 나누어 주는 게 어떨까? 시간이든 인내심이든 긍휼의 마음이든 좀 더 후해진다면 매일 무엇이든 한 가지 친절을 베풀 수 있지 않겠는가. 마침 학교 작업실에서 복사를 하고 있는데 녹초가 된 듯한 어떤 선생님이 불쑥 들어와 이렇게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해도 될까요? 지금 이걸 200장이나 복사해야 하는데 제 학급을 봐줄 사람이 달리 없어서요.” 나는 그 선생님이 들고 있던 종이를 받아들고는 이렇게 답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복사해서 교실로 갖다드리죠.” 그렇게 40일 동안 평소보다 더 많이 칭찬해주고, 문도 자주 열어주고 운전할 때나 마트계산대에서 줄서있을 때도 더 많이 양보했다. 어느 날 저녁 문득 그날은 한 가지 친절도 베풀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날 “가족 전원에게 발마사지 서비스!” 내가 이렇게 발표하자 남편과 딸이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가장 좋았던 건 그런 마음이 사순절이 지나고도 한참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헌신적으로 내어주니 일 년 내내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글이었습니다. 뭐 이런 것 까지 가이드포스트에 올리나 그런 생각도 들지만 그러나 사실 이렇게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고백입니다.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굉장히 잔잔한 감동을 느꼈던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이렇게 작은 일 하나하나부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자발적 불편은 물론이고, 자발적 불편을 감수하면서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런 일들을 주님께서 원하시는데 정현구 목사님 기도에도 마음 아픈 표현이 들어있었습니다만 성경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그 성경이 가르치는 바대로 사는 것은 또 별개가 되는, 이게 다른 사람보다 한국 교회의 목사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막 드러나는 이런 때여서 아마 이런 글이 마음에 더 와 닿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부인이 말씀하신 이렇게 자신을 헌신적으로 내어주니 일 년 내내 기분이 좋아진다. 이 말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분이 안 좋으면 카드를 긁고 돈을 좀 쓰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런 부인도 교회에서 가끔 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좀 어린 사람이면 그렇겠거니 하겠는데 교회를 다닌지 꽤 오래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을 부끄럽게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목사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될까? 저렇게 말하는 사람을 잘못 가르친 내가 하나님 앞에 울어야 되나 아니면 ‘하나님 저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 설교 듣는 것 가지고 내가 저 사람의 저 말까지 책임을 져야 됩니까?’라는 그런 고민스러운 질문을 하나님 앞에 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두 번째 기쁨, 두 번째 쉼, 두 번째 즐거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돈을 신나게 써서 얻는 기쁨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뭔가 행해서 얻는 기쁨하고는 구별되는 비그리스도인들은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인만이 알 수 있는 섬기는 자만이 알 수 있는 바로 그런 기쁨을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이 우리 기윤실의 자발적불편운동을 통해서 불편한 마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불편운동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더 큰 쉼, 더 큰 평안 이게 더 널리 전파되는 운동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씀을 우리가 참 편향적으로 가르쳤고 이해해왔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 친구 목사가 와서 설교를 했는데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설교준비를 다 해놓고 목요일 날 주보가 인쇄소로 넘어가야 되니까 목요일 날 외부에서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본문하고 제목을 줬답니다. 전화에 대고 목회비서한테 이번 본문은 시편 23편 1-6,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목사님 그게 전부입니까?” 해서 “뭐가 더 필요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는 겁니다. 토요일 날 점심 먹고 오니까 주보가 책상위에 올라와 있었는데 본문이 제대로 나왔나 보니까 본문은 제대로 나왔는데 제목이 잘못 나왔다는 겁니다. 뭐라고 나왔냐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뭐가 더 필요해’ 이렇게 나와 있더라는 겁니다. 목사님이 화가 나서 ‘무슨 일을 이렇게 하나’ 야단을 치려고 인터폰을 들었는데 인터폰을 들고 다시 보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뭐가 더 필요해’ 이게 괜찮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터폰을 내려놓고 그 제목을 가만히 보는데 마음에 감동이 밀려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준비한 설교 원고를 꺼내서 ‘뭐가 더 필요해’에 맞춰서 원고를 다시 고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굉장히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친구 얘기를 들으면서 시편 23편을 다시 가만히 읽어보니까 맨날 저는 1절만 읽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러고는 건너뛰어서 푸른 초장으로, 맑은 물가로 시편 23편을 가만히 읽어보니까 찬송 가사로도 많이 들었고, 설교도 더러 해보고 했는데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원수의 목전을 지나가고 이 구절이 분명히 있었는데, 시편 23편 그러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나 원수 앞이 생각이 나는 게 아니고 푸른 초장 맑은 물가만 생각이 나고 하나님이 인도해가시면 마치 그리로 직행해서 가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데도 힘들면 안 되고 여호와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가시는데도 사람들 앞에 번듯하게 내어놓을 만한 것 아니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 자신부터 얼마나 편향되게 이해하고 있었나를 새삼 느끼게 해준 그런 설교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도록 할까요? 그건 불편 정도가 아니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아픔과 온갖 누추함을 보면서 지나가야 하는 곳인데 왜 그리로 가야할까요? 사망 없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기로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옛사람의 영향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어서 우리의 언어도 죽음의 언어가 남아있고 우리의 행함도 아직도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게 오늘 우리의 씨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씨름이 바로 자발적불편운동을 통해서 한걸음, 한걸음 천리길을 바라보면서 행군을 해나가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삶, 성화, 거룩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감,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이 말씀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길을 걸어가면서 한걸음을 떼는 기분으로 오늘 내가 조금 불편해도 내가 감당해야 될 일이 뭘까? 또 한 걸음을 떼는 마음으로 내가 조금 불편해도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일이 뭘까? 겸손하게 잘 시작한 운동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뭘 시작하면 당장 세상을 바꿀 것처럼 시작을 하는데 하나님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너부터 좀 바꿔야 된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늘 시작하면 조직 만들고 이런 버릇이 제 자신부터 몸에 배어 있다는 걸 사사건건 느끼고 있습니다. 뭘 시작하면 얼마나 바르게 할 것이냐 그런 생각보다는 뭘 시작하면 얼마나 폼 나게 할 것이냐는 유혹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이건 목사건 장로건 비그리스도인이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가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그들과 구별된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우리가 세상을 조금씩 섬기면서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런 길을 주님이 가도록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을 이 밤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빼내셨던 그 광경을 지난 주간에 묵상하면서 요즘 민수기를 읽으면서 그 광경을 묵상하게 되는데 이런 대목이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애굽을 빠져나오던 때 애굽이 어떤 나라입니까? 전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사람들이 애굽에 살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문명이 발달 되고, 가장 세련되고, 가장 교양 있고, 가장 근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애굽을 ‘미츠라임’이라고 표현했잖습니까? 그 미츠라임이라는 단어가 검다고 하는 어원을 가진 단어라고 하는데 원래는 나일 강 상류에서 검은 흙들이 떠내려 와서 홍수가 날 때 나일 강 좌우편으로 검은 흙이 뒤덮여서 옥토를 만들고 거기에 작물을 심어서 이집트의 부요함과 문명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미츠라임, 검은 땅이라고 하는 말이 부요의 상징이었고 세련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문명, 역사도 이집트 문명을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에 하나라고 말하고 지금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흔적들을 보면 현대인들도 머리가 수그러지는 그런 문명을 이미 그 당시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마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거기는 사람 살 데가 못되는 곳, 자기 백성을 빼 내와야 하는 곳으로 규정을 하고 그 미츠라임이라는 땅을 어둠의 땅이라고 주님께서 선포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빼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할 만 하다고 생각이 드는 게 그 근사한 땅에서 빼내서 광야 길을 걸어가게 하지 않습니까? 백성들의 불평이 오늘 우리에게도 반복되고 있습니다만, 길이 험하다고 불평을 하고 부모세대가 그러다가 광야에서 다 죽어 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40여 년이 지나서 다시 가나안 가까이 와서도 그다음 세대도 똑같은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또 죽이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은 부모세대의 실패를 만회하고 이 세대가 믿음이 자랐기 때문이 아니고, 별로 잘 한 것 같지 않습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새로운 세대, 가나안으로 여호수아와 함께 들어가는 세대가 부모들하고 똑같은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서 물어 죽이기도 하고. 결국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때문에 제2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다시 필요합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 민족이 쓰러져갈 때 이 땅에 복음을 주시고 신실한 세대를 일으켜서 민족을 살리게 했던 그 교회가 이제는 민족의 짐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를 생각하면 생각이 깊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머리를 흔들고, 우리가 봐도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게 아니고 짐이 되고 있고 우환 거리가 되고 있고 자기 동네에 맥주집이 하나 더 생기는 게 낫지 교회가 하나 더 생기는 게 아무것도 나을게 없다고 전에는 그런 얘기 들을 때 ‘자식들이 까불고 있네.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는데 지금은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 할 말이 없는 그게 오늘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25년 전에 기윤실 운동이 처음 시작될 때 저는 그해 87년 7월 말에 교회에서 공부를 하라고 해서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 어느 주일날 손봉호 장로님께서 기윤실 창립선언문을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읽어보고 영국으로 가고, 그해 연말에 기윤실이 시작이 되었는데 참 25년이 지나고 우리 백종국 교수님 표현하신 것처럼 지금에 와서 기윤실 운동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는 이 기가 막힌, 기윤실은 한 10년 하고 없어졌어야 됐는데 경찰서도 없어지고 교도소도 없어지고 병원도 없어지고 다 없어져야 될 것들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 우리 기윤실도 그런 점에서 10년하고 없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윤실 운동은 교회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윤리운동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성경을 많이 읽고 예배에 착실하게 참석을 하면 저절로 윤리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지는 이런 운동이 교회를 통해서 그동안 진행되어 왔으면 우리 기윤실이 자살 지향 운동이 되고 말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전혀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홍정길 목사님께서 은퇴하는 것을 제가 보면서 저는 꼭 10년 남았는데 요새 그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10년 동안 별일 못하더라도 무사히만 은퇴하면 정말 좋겠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교회들이 이렇게 수치를 당하고 있고, 교회가 수치를 당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데 우리의 선배들이나 부모세대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런 때에 우리가 어떻게 기윤실 운동, 신앙운동을 해 나갈 것인가 이런 고민을 이 밤에 다시 한 번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간구하십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한 번 주님의 일꾼으로서 주님이 기대하시는 꿈꾸게 하시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이 시간 먼저 함께 생각하면서 말씀을 가지고 잠시 묵상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관련 내용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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