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 11
여행을 떠나기 좋은 날씨였다. 수서-분당간 고속화 도로를 따라 가다가 광주쪽 방향의 이배재 고개를 넘어 도착한 곳이 <홍두깨>라는 이름의 작은 칼국수 집이었다. 그곳에서 자문위원장이자 기윤실 창립자이신 손봉호 교수님을 뵙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겐 기윤실!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손봉호”다. 그건 당분간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는데 아반떼 한대가 들어오고, 교수님이 내리시는 모습이 보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벌떡 일어서 움직이는 간사들의 모습에서 존경과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조용한 미소와 건네는 악수의 손길에 나는 어린아이 같이 기뻐하고 있었다. 기윤실 간사로 일하게 된지 1년여 만에 찾는 교수님과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더 감격적이었던 것 같다.
사무총장님과 간사들, 윤성웅간사 아내와 시율이 시화, 두 아이까지 총동원 되서 벌써 대가족이었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흐뭇해 하시는 모습도, 남은 칼국수를 집에 기르는 강아지에게 주시겠다며 싸 달라시는 모습까지 정겹고, 또 그분의 깊은 삶의 일부분을 보는 듯 했다.
목현동 산 위쪽에 자리한 자택은 수려하면서도 고적한 그분의 미소를 닮아 있었다. 집 앞, 파스텔풍으로 자리한 은행나무의 풍광은 가만히 우리를 쉬게 했다.
사모님께서는 집앞 텃밭에서 기르셨다며 고구마와 삶은 땅콩을 꺼내 놓으셨다. 거실 원목 테이블에 둘러앉아 ‘기윤실과 손봉호’에 대한 이야기들을 생생하면서도 무게있게 들었다.
“젊음의 때에 공익을 위하여 애쓰는 것이 여러분들 한 사람 한사람의 남은 일생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조금만 힘써 주세요.” 강하면서도 차분한 어조로 건네는 이 말이 내 가슴에 무겁게 감동으로 내려앉았다.
새롭게 시작하는 기윤실 운동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렇듯 선배 운동가들의 깊음과 한결같음에 맞닿아 있음 때문임을 안다. 세간에 시민운동가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처음 그 뜻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도 있는데, 기윤실도 매순간 스스로를 자정하며, 처음 손봉호교수님과 함께 뜻을 모아 창립했던 그때의 정신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짧은 만남이었는데, 무겁지만 기대되는 어떤 희망들을 하나씩 품고 돌아 올 수 있었다. 손봉호 교수님, 그리고 기윤실이 이 사회에 여전히 정직한 희망을 만들어가는 뿌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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