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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청년이 희망이다

교회 개혁의 필요성


2006. 5. 15

   심리학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에는 크게 네 가지 측면의 영역이 있다고 한다. 나와 타인이 모두 아는 영역, 나와 타인이 모두 모르는 영역, 나는 알지만 타인은 모르는 영역, 나는 모르지만 타인은 아는 영역, 이렇게 네 가지 영역이다. 사실 인간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앞에 두 가지 영역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뒤에 존재하는 두 가지 영역으로 인해 인간관계는 금이 가고 불신과 불안을 형성한다고 한다. 때문에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타인을 통해 나를 볼 수 있고, 더불어 타인이 모르는 영역을 인식하고 나 자신에 비추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이러한 인식을 서로가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이 아닌 공동체는 강점을 가진다고 본다.
  
   종교계는 그간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세상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형성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사회라는 영역이 더럽고 추악한 것을 인식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사회에게 인식시키려는 노력은 상황적 특수성 내에서만 존재하였다. 세상을 바꾸고 사회를 정화시키는 임무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작 사회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종교계라는 영역 내에서만 운동을 한다. 때문에 사회 문제에 대한 근본적 인식을 하지 못하고, 운동의 방향성 역시 올바로 설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사회에서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비판도 종교에 대한 근본적 인식의 부재에서 오는 비판이라는 말로 일축시키며 종교계 스스로의 자아성찰마저 금지한 측면이 있다.
    
    중세의 교회는 기본적으로 정보의 불균형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사제들에 의한 성서의 공유는 많은 신자들을 온갖 거짓으로 현혹하였으며, 면죄부 판매라는 어이없는 발상까지 나오게 하였다. 이번 강의에서 다룬 마녀 사냥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지금의 정보 사회에서 발생하는 정보 소유의 격차는 중세에도 존재하였으며,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권력 세력의 힘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종교 개혁은 단순한 종교적 영역만을 건드린 것이 아니었다. 중세는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종교계 내의 사회적 운동이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다. 강의에서 다룬 것처럼 예수님도 NGO적 발언을 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교회도 개혁이 필요하다. 사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종교계는 국난의 순간마다 중요한 사회적․역사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한국만 보더라도 왕조의 말기에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시키고 민중을 계몽한 것은 불교와 기타 신흥종교였으며, 현대사에서 독재정부와의 싸움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목사님들도 있었다. 1987년 박종철 고문 사건은 독재 시대 고문의 평범한 사례에 지나지 않았으나, 가톨릭계의 철저한 진상조사로 인해 6월 항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종교계는 보수주의란 말을 수식어로 달고 있다. 사회 개혁의 선두에 있었던 종교계는 국난이 끝나고 사회의 주적이 사라지자 자본주의 사회의 행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회 역시 겉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기업적 성장의 모습을 보이기에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강의해 주신 박천응 목사님이 성도들을 앞으로 ‘고객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 것이 결코 웃을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누구도 교회를 혁명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혁명은 그 체제의 근본적인 것까지 모두 바꾸는 것으로 개혁과는 다르다. 따라서 종교개혁도 종교혁명이라 불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 개혁하면 이내 거부감을 보인다. 또한 목사님을 비판하는 것을 마치 예수님을 비판하는 것처럼 동일시하기도 한다. 이것에 대한 구분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선거 과정에서 입후보자들이 표심을 얻기 쉬운 장소로 교회를 손꼽는다. 그 이유는 목사님 한 분만 설득하면 교회 성도들 절반 이상의 표를 얻는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인과 유착하는 목사들을 비판하는 것이 과연 예수님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는가? 교회에 들어가면서 주보보다 시의원 출마자들의 명함부터 받는 것이 나는 불쾌하다.
  
     교회가 NGO처럼 공공성을 가진 운동을 하려면 이러한 작업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세계화라는 그럴 듯한 이름 아래 숨겨진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공공성과는 정반대에 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가 보수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는 뉴라이트(신우익) 운동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 벌이는 공공성 운동은 ‘그들만의 잔치’라는 이름을 들으며 사회의 외면과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기독대학생들은 이러한 사회의 비판을 여과하여 교회 개혁에 반영해야 하며, 기독교 내에서도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언론과 같은 옴부즈맨의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외부 지식인들에 의한 무비판적인 개혁의 수용은 기독교 본래의 의미를 훼손시켜 자칫 ‘혁명’적 요소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시민단체의 역할은 이러한 교회 개혁 추진의 길을 열고, 다양한 개혁의 방안을 모색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신자유주의는 구조적으로 공공성의 부재를 안고 있다. 경쟁에 경쟁만을 강요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속에서 공공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설이다. 따라서 교회가 이러한 공공성 부재의 해결을 감당하지 않는 것도 올바른 모습은 아니나, 지금의 교회는 그 스스로가 가지는 병부터 치료해야 한다. 병든 환자에게 기름진 고기부터 먹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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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기 기윤실 NGO 아카데미 수강생 배대웅 학생 , 가톨릭대학교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