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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그리스도인/자발적불편운동

교회 역사 속 자발적불편운동① - 국채보상운동

2012년 기윤실에서 시작한 자발적불편운동.

그런데... 이 자발적불편운동을 기윤실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을까요?

 

안타깝지만 아니었습니다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인들이 주도한 자발적불편운동이 있다는 사실, 여러분들은 알고 계셨나요?


역사 속의 자발적불편운동첫 번째 시간!

오늘은 대한제국 말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소개합니다.



 


여순항. 이곳 항구에서 일본의 선제 포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클릭)


때는 을사늑약이 있기 1년 전인 1904(광무 8), 러시아의 세력이 갈수록 커져가는 것에 불안을 느끼던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의 승자는 일본이었습니다. 이로써 조선 내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낸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고,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협약에 따라 일본에서 추천한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조선 정부에 두었습니다. 두 고문의 승인 없이 조선정부는 재정과 외교에 관한 어떠한 안건도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죠.

 




일제가 한국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 군산항에 쌓아둔 광경.

출처 :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클릭)

 

조선의 재정권까지 손에 쥔 일본은 조선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해 강제로 차관을 도입시킵니다. 강제로 일본에 빚을 지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 차관마저 조선인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일본 경찰기구 확장,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 충당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에 사용되었습니다. 1907년 들어서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원이나 되었습니다. (5년 거치로 준 것인데, 심지어 전액을 주지도 않았다는...;;) 그 해 대한제국 1년 예산이 1,370만원이었으니 정부의 1년 예산 만큼이나 빚을 지게 된 것이죠.



을사늑약 문서.  제1차 한일협약이 있은지 14개월 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클릭)




서상돈(1851~1913).

출처 : doopedia(두산백과)(클릭)


이에 대구지역 유지들의 모임인 대동광문회모임에서 거금 800원을 국채상환에 쓰자며 내놓은 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서상돈(1851~1913)! 이에 다른 지역 유지들도 돈을 내놓게 되었고 그날 모임에서만 2,000원이 모였습니다. 발기인 서상돈, 김광제 등 16명이 뜻을 모아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었고 이 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됩니다


김광제(1866~192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클릭)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출판사 광문사의 특별회의장에서 김광제는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알리며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고 합니다.


"..........나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부터 흡연 도구들을 만장하신 여러분 보는 앞에서 부숴 버릴 것입니다.  (중략)  황천(皇天)이 감응하여 전국 인민으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대사를 무사히 이루시고, 민국을 보존케 하옵소서!”" 


난데없는 금연 선언이었지만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진지했습니다. 사장과 부사장의 재떨이와 곰방대를 부숴버리는 것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것이죠. 즐겨 피운 담배를 끊는 불편을 감수하자는 것으로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왜 하필 담배냐구요? 당시 조선에서 유통되던 담배의 대부분이 일본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끊는 행위만으로 일본으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하고자하는 저항 의지가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황성신문 논설. 1907년 2월 25일자. 담배를 끊어 국채보상운동을 하자는 취지의 논설을 실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클릭)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가 설치되어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의 각종 신문사들은 캠페인을 알리고 후원하는 방법으로 적극 지원하였고, 특히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하여 한규설, 양기탁 등의 임원을 선출하였습니다.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문

출처 :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 운동 실시 후 약 4개월 간 각계각층에서 4만여 명이 참여하여 230여 만 원을 모금하였습니다. 모금 외에도 비녀, 가락지, 은장도 등을 기부하거나 머리를 잘라 판 돈을 낸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대구에서는 장애인이었던 걸인이 20전을 내놓아 사람들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금주와 금연으로 동참하자는 물결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앞서 밝혔듯, 당시 조선에서 유통되던 술도 담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일본산인데다가 소비량도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대중들의 뇌리에 술과 담배를 끊는 행위는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일본에 저항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죠

 



양기탁. 독립운동가. 언론인.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김규식,조소앙,최동오,유동열 등과 가담, 대일전선통일에 노력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클릭)


하지만 일본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겠죠.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본은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1871~1938)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운동을 간교하게 탄압했습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이 거족적인 경제적 구국 운동은 좌절되었습니다.

 

국력이 쇠할 때 국민이 하나 되어 국난을 극복하는 한국인의 의지, 한국 역사 속에서도 여러 차례 있어왔습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를 보면 위기 때마다 국난극복을 주도했던 이들 대부분은 기독인이었습니다. (서상돈 선생은 가톨릭, 김광제 선생과 양기탁 선생은 개신교인입니다.)

 

자발적불편운동. 기윤실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최첨단 사업(?)으로 도입한 것이 아니었구요. 이미 누군가에 의해 나부터 불편함을 감수하여 공동체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롭게 하자는 뜻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 자발적불편운동으로 함께 시작해 보는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