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기윤실 회원총회+신년강연회
"양극화해소와 기윤실 운동" 강연록
지난 2월 26일, 2015년 기윤실 회원총회 1부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신년강연회 강연록을 공유합니다.
● 일시 : 2015년 2월 26일(목) 오후 7시~8시
● 장소 : 서울영동교회 교육관 5층(디모데홀)
● 주제 : 양극화해소와 기윤실 운동
● 강연 : 강영안 이사(서강대 철학과)
제가 받은 주제가 양극화해소와 기윤실 운동인데, 제가 기억하기로 “양극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된 것은 70년대 초반이었다. 그 당시 "polarization" 즉 "양극화"라는 용어는 안병무 교수 같이 주로 한신에서 활동하는 신학자들이 사용했었다. 나중에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활동하셨던 분들이다. 그 뒤에 민중신학에서 이 개념을 발전시켰었다. 한동안 잠잠해졌다가 다시 양극화가 익숙하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당시 한국사회는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 상대빈곤 차원에서 부의 분배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식이 확산되면서 다시 대두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양극화는 단순이 빈부 문제가 아닌, 세대갈등, 이념갈등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2003년에 이라크파병문제로 한국 내 보혁 간 극심한 갈등이 있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이념갈등이 두드러지는 새로운 양상이 생겼다. 시청 앞에서 이라크파병을 찬성하는 극우 기독교인들과 교회 내에서 파병반대를 외치는 청년들이 공존하는 극단적 현상이 드러난 것이다. 이라크파병 문제뿐만 아니라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교회의 진보와 보수적 양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진보적 교회와 보수적 교회를 가르는 것이 신학적인 차이였다면 2000년대 진입 하면서 신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념 때문에 진보와 보수의 다른 양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기윤실도 좌파 쪽에 가깝다고 지목받는 일도 있었으니 말이다. 기윤실이 진보 진영 쪽에 있었던 적이 없었으나, 한국기독교의 전체 지도를 그려보니 기윤실이 왼쪽으로 맵핑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교회 내 성도사이의 빈부차이, 교회와 교회 사이의 빈부차이 즉,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차이 뿐만 아니라 특별히 교역자와 교인 사이의 차이도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교역자는 사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삶을 요구받지만, 교인들의 생활은 훨씬 윤택해지고 있는 것이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가 속한 노회에서 각 교회 교역자의 사례비 조사를 해 봤더니 많이 받는 분이 약 300만원정도 받고 계셨다. 사례라고 해봐야 보너스는 200~400% 수준인 것과 사택과 차량이 제공된다 하더라도 순수사례비만 보더라도 교인들과 상당한 격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양극화 발생원인은 무엇인가?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이 훨씬 더 면밀하게 살펴보겠지만, 철학자로서 또 기윤실 운동을 함께 하는 입장으로서 양극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양극화가 왜 문제인가? 그 이유는 양극화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불화와 갈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화가 실현되지 않고, 끊임없는 불화와 갈등이 발생하는 현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서도 양극화는 있다. 힘센 동물도 있고 약한 동물이 있다. 먹이사슬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으로서의 인간사회 내의 양극화 역시 ‘자연스러운’ 것인데, 왜 문제시 된다고 하는 것인가? 힘센 사람과 약한 사람, 머리 좋은 사람, 머리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이 문제를 신화 중 하나의 이야기와 연관 지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프로타고라스〉에 보면 프로메테우스 형제 이야기가 나온다. 태초에 신들이 이 형제에게 동물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주도록 임무를 맡긴다. 먼저 프로메테우스의 이름 뜻은 ‘먼저 생각하는 자, 앞을 내다보는 자’이고,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하는 자, 뒤돌아보는 자’라는 뜻이다. 신들로부터 임무를 받은 이들 중 먼저 ‘에피메테우스’가 먼저 나서서 동물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준다. 힘센 동물들은 몸을 무겁게 만들고, 힘이 약한 동물을 재빠르게 만들고 보호색을 나눠주었다. 그런데 나눠주고 나서 돌아보니 인간에게 나눠 줄 것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없었다. 궁리를 하던 중에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 올라가서 인간에게 나눠 줄 두 가지를 훔쳤는데, ‘불’과 ‘기술’이었다. 신들의 무기를 훔쳐 인간에게 나눠 준 일이 발각된 프로메테우스는 벌을 받는다.
그런데 신의 무기를 가진 인간은 ‘같이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매일 흩어지게 되었다. 이를 지켜본 제우스가 헤르메스를 보내서 인간에게 두 가지를 주었는데, 헬라어로 ‘아이도스’와 ‘디케’를 준다. ‘아이도스’는 수치심, ‘디케’는 정의감이다. 인간이 공동체를 형성해서 살기위해 필요한 기술 즉 수치심에 근거한 도덕 감정과 정의개념에 근거한 법 개념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이 살 수 있게 된 것은 자연과의 유사성이 아니라, 다른 자연이 갖지 못한 것을 신들에게 겨우 얻었던 두 가지 덕분이었다. 성경과 유사하다. 사람들이 함께 살지 못하고 어떤 이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어떤 이는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책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양극화 뿌리는 불의의 문제와 연관된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행하고, 내 것과 네 것을 정의롭게 분리하기 보다는 가장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본능에 근거해 취한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무엇보다 정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시편 37:28)
그런데 하나님은 정의를 단순히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정의를 행하심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시편 103:6)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편 140:12)
이렇듯 성경은 하나님이 정의를 사랑하시고, 정의를 베푸시고 행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시고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정의를 요구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신명기 16:18~20)
구약성경에서 ‘정의’를 이야기 할 때, 두 가지 다른 단어가 사용되는데, 하나는 “미쉬파트”, 다른 하나는 “차디크”이다. “미쉬파트”는 justice, judgement로 해석되고, 공정한 재판을 할 때 사용된다. 가난하다고 봐주고, 부자라고 봐주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심판하신다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행위에 따라 정확하게 심판하신다. 공의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정의 앞에서는 빈부외모 구별이 전혀 없다.
한편, “차디크”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를 보면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 이방인들의 권리를 옹호해주고, 그들의 억울함을 신원하는 맥락에서 사용되는데, 영어로는 righteousness, justice로 번역된다. 어떤 경우에는 “차디크”와 “미쉬파트”가 동시에 사용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정의에 대한 호소는 토라에서도, 아모스와 미가서 등 선지서, 예언서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신원하시고 그들 편에 서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정의를 이야기 하면 이는 구약에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약시대에서는 정의와 평화, 고아와 과부 내용은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렵고, 구원은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제한적으로 적용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서 누가복음 4장(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을 찾아 읽으신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눈먼 자들에게 다시 보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이유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오늘 날 아주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어떤 이유이든 약자 위치에 처하게 된 사람들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난이든, 무식이든, 신체적 장애이든, 사회적 홀대와 차별이든 가난한 이들과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의 오심은 그러한 차별과 간격,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양극화를 극복하는 것이 곧 복음이고 하나님 나라의 오심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showing)이다.
기윤실이 올해 양극화 해소에 힘써보겠다는 것은 양극화에 기인한 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 자리가 회원총회이니만큼, 기윤실이 양극화 해소에 어떻게 기여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1987년 창립이후 기윤실의 처음 운동은 검소절제 운동이었다. 예를 들어서 작은차 타기, 에어컨 사용하지 않기 등이었다. 2006년 이후 교회신뢰회복운동을 펼쳐오다가 최근에는 자발적불편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양극화 해소는 기독교윤리의 핵심이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 윤리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말씀을 정리하시면 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레위기 19장 34절과 짝을 이루는 말씀이다.(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기윤실의 양극화해소를 위한 운동은 이웃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웃’이라는 개념은 항상 ‘가까이’라는 뜻을 생각하게 되지만, 최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이웃과 가까이 살고 있으나 ‘이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웃은 공간적 인접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이 사마리아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마리아 비유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라는 물음에 예수님은 말(saying)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showing)것을 통해 ‘이웃’의 뜻을 전하셨다.
이웃이란 고통당한 사람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의 이웃은 강도만난 사람, 즉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다. 고통 받는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고통 받는 사람이 곧 이웃인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역으로 다시 질문하신다.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이웃이 누구입니까?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시고 고통당한 자가 이웃임을 보여주시고, 역으로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냐는 물음을 통해서 이웃의 개념을 이웃이 되어주는 것 즉, 주체 개념으로 완전히 바꿔버리셨다. 고통 받는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내가 이웃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기윤실의 핵심과제라 생각한다면 양극화 문제 특히 여러 이유 때문에 고통당하고 억눌리고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겠다는 것은 당연하다.
기윤실이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 애써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싶다.
첫째, 양극화해소는 국가의 과제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교수 임기 3년을 남겨놓고 정년퇴직을 앞당겨 하게 됐다. 일종의 일자리 나누기 차원이다. 최근 화두가 된 조세 정책 뿐만 아니라 복지 정책에서도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어야 한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제도마련과 의식변화 등에 대해서 기윤실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둘째, 교회내의 각성이 여전히 필요하다. 교회에서 기독교윤리에 대한 각성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 안의 양극화, 즉 성도와 성도, 성도와 교역자, 교회와 교회 사이 등 교회 안에 존재하는 양극화를 다시 한번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특히 교역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챙기고, 점검해보아야 한다. 가난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도 교회의 역할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한다. 교회는 말씀 충만, 성도의 교제, 그리고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것 즉 코이노니아(나눔)이다. 나눔은 서로 같은 형제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성찬을 통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제대로 된 성찬으로 시작된 코이노니아가 필요하다.
셋째, 개인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교인들은 보다 단순한 형태로 살아가야 한다. 부에 의존하기보다 심플하고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이다. 늘 검소 절제하는 이유는 물질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눠 쓰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오히려 나눔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공동체와 공공선에 대한 관심을 두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윤리의 핵심임을 기억하면서 기윤실은 현재 어떤 이유에서라도 고통 받는 이웃을 살피고, 예수님이 보이신 것을 따라 고통 받는 이들에게 주체적으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국가와 교회, 교인들의 삶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운동을 펼쳐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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