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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그리스도인

강영안 교수, <더보이스> 인터뷰 "생각하지 않으면 우상을 섬기게 된다"

기독교인터넷신문 <더 보이스>에 강영안 교수(서강대 철학과)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강영안 교수는 기윤실 창립발기인으로 공동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기윤실 운동에 헌신하셨으며 현재 이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인터뷰 중에도 기윤실 운동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터뷰는 기윤실 정직윤리운동본부장인 신동식 목사(빛과소금교회)가 진행했습니다.

<더 보이스>의 허락을 받고 전재합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우상을 섬기게 된다
철학과 신학의 접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좌표를 제시하는 강영안 교수 ①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두 권의 책을 낸 강영안 교수를 인터뷰하려고 20일 전부터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바로 전날 갑자기 연락이 왔다. 당일에 일정이 많아서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만났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시간에 쫓기면 깊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없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서강대를 찾았다. 그런데 예상은 기우에 불과했다. 강영안 교수는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시간이 부족할 것을 염려해 앞당겨 주신 것이다. 인사를 나눈 직후부터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강영안 교수는 다양한 현안에 대해서 폭포수처럼 이야기를 뿜어냈다. 연구실에 도착한 후 인사를 나누자마자, 최근에 출간된 <그 사람의 서재>를 선물로 건네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터뷰는 더보이스 편집위원인 신동식 목사가 진행했다.



강영안 교수(오른쪽)를 인터뷰하는 신동식 목사(왼쪽) ⓒ더보이스 이은창


신동식 : ‘복음과 상황’의 코너 ‘그 사람의 서재’에 실렸던 교수님 인터뷰 내용을 읽었습니다. 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강영안 : 당시 ‘복음과 상황’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 경남 사천에 내려가서 밥 먹으면서 식당에서, 박재삼 기념관이 있는 공원에서, 그리고 책이 있던 집에서 6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글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인터뷰 진행자로 김기현 목사를 먼저 요청했습니다.

신동식 :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기독교 평화주의 활동이 활발한 것 같습니다.

강영안 : 교회에서 십계명에 관해 설교한 것을 책으로 냈습니다. 그중에서 전쟁과 사형제도에 관한 설교도 했었는데, 결론은 단순합니다. 사형제도와 전쟁은 원칙적으로 가능지만 실제로 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전쟁수단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막강한 화력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전쟁수단인 창과 화살로 해당된 사람, 곧 전쟁에 참여한 군인만 죽일 수 있었습니다. 정당한 전쟁론에 의하면 전쟁의 시작(원인)과 전쟁의 수행 과정도 정당해야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공격이 아니라 방어만 해야 한다거나 민간인과 아이들을 죽여서는 안 되고, 농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룰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켜지기도 하고, 안 지켜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무기는 핵무기 외에도 막강한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 군인을 투입하지 않고도 다양한 무기로 제압할 수 있었지만 지상군을 투입하면서 3,50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폭탄이 건물은 파괴하지 않고도 사람만 죽일 정도로 정교해지면서 무차별적인 살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대 전쟁에서는 아무리 정당한 전쟁이라 해도 그 자체가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전쟁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전쟁이 불가능한건 아닙니다.

신동식 : 제럼 바즈라는 사람이 쓴 책을 보면 핵무기 시대이기 때문에 아나뱁티스트의 평화주의적 관점은 맞지 않다고 한 것을 봤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오히려 핵 억제정책이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으로 평화주의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는데요.

강영안 : 우리나라에서 평화주의를 내세운 대표적인 한 사람이 함석헌 선생입니다. 그도 절대적 평화론자는 아니었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절대 전쟁이 불가하다는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요?

신동식 : 한국사회는 뭔가 들어오면 논쟁을 통해 걸러지는 여과장치 없이 그냥 여론몰이로 마치 정설인 것처럼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강영안 : 옛날에 손진태라는 분이 계셨는데, 우리나라 문화인류학의 선구자이신 분입니다. 그분이 쓴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유교가 왜 이렇게 순수주의 유교가 되었는가에 대한 글입니다. 오히려 공자나 맹자 나중에 주자보다는 순자를 받아들였더라면 그렇게 순수주의가 되지 않았을텐데, 글로 배워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 현실 속에서 유교가 실천되기 때문에 그런 유교가 없습니다. 우리는 책보고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 태권도 할 때 실제로 하는 게 아니라 교본 보고 배우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몸을 통한 삶 속에서의 배움보다는 책과 글을 통한 배움이 훨씬 교조적이고 순수하면서도 극단적인 종교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텍스트가 삶을 반영하고 삶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삶은 아니지 않습니까? 삶도 맨 몸 자체가 삶은 아닙니다. 텍스트를 통해서 삶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니면 삶을 텍스트로 삼으면 그 삶을 컨텍스트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텍스트가 되고 삶을 읽어내는 다른 것이 컨텍스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련해 마태복음을 보면 “기록되었으되 이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이루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12살 때 성전 올라가셔서 토론하실 때나 30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그리고 공생애 사역 전에 금식하고 세례받고 하는 장면을 보면 이미 정해져있는 그 길을 철저히 순종하면서 따라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사역과 역할을 다 이루었다는 삶의 의식이 있으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대로 절대 순종하면서 걸어가겠다고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부활도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말했듯이 ‘성경대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근거한 삶이었습니다. 성경대로 기계적으로 따른 것이었다면 ‘순종’이라고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응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도 삶과 텍스트 사이의 관계가 드러난 것입니다.

신동식 : 교수님에 대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강영안 교수님의 지상강의는 역사의 현장 속에서 살아가는데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였다. 철학은 삶의 연속가운데 드러나는 사랑인 것 같다. 배울 수 있을 때 배웠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철학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은 무엇인가요?

강영안 :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학문적 철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년간 개념을 가지고서 개념을 다루고 개념을 연결시키고 개념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훈련을 거쳐야 학문적 철학을 익힐 수 있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거기서 물음을 제기할 수 있으려면 한 두 달로 되는 게 아니라 몇 년을 집중해서 씨름해야 이해하고 그 다음에 남에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건 학문적 철학보다는 ‘생각하기’입니다. 생각하기는 생각을 하는 연습, 생각하는 훈련,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배는 것입니다. 사는 게 무심코 생각 없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무념무상이 인간의 복된 삶이라고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생각한다는 게 논리적, 창의적으로 생각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생각한다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건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분에 꽃이 피어나왔다고 무심코 자르려고 하다가 멈추고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다시 바라보고 곰곰이 들여다보고 따져보고 분간,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화는 서양 15세기 근대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건 활동, 행복. 심장을 멈추고, 내려놓고 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목표를 세우고, 수단을 찾아내고, 그 목표를 이루어내는 방식의 활동의 문화. 성과의 문화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효율성입니다. 여기서는 활동하고 성과를 내는 가운데는 깊은 생각이나 넓은 생각, 둘러보고 뒤져보는 방식에 시간을 내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생활하면서 이것 또한 활동이 되니까 업적을 거두는 게 됩니다. 성경통독, 전도숫자, 헌금액수, 예배참석횟수 등. 신앙생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외적인 것들에서 일정한 업적, 결과를 산출하는데 집착하게 됩니다.

15세기 이후 근대문화의 영향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면서 근대교육, 정치, 학문 등 근대 방식의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습니다. 왜 철학이 필요하냐면, 성과중심의 신앙생활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도 잠시 멈추어 서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세밀하게 분별하고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나를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철학이 필요합니다.

생각이 전부는 아닙니다. 논리적·비판적 생각, 창조적·창의적 생각,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상식적 생각 등 다양한데, 사람을 생각하고 자연, 이웃을 생각한다고 할 때 생각한다는 것은 배려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중심에 놓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내어놓는 것입니다. 성과중심, 업적중심 사회에서는 하나님, 이웃, 자연, 우리 주변을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노동의 문화, 노동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문화는 삶을 지배 가능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의 ‘안식’이란 책에서 안식일을 시간의 시간, 시간의 지성, 곧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간의 개념이라면 잡을 수 있지만, 시간은 잡을 수 없습니다. 시테크라는 말은 시간을 잘 활용하고 내 생활계획을 잘 짠다는 말이지 시간이 내게 지배당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공간은 지배할 수 있지만 시간은 지배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헤셀 방식으로 생각하면 안식을 제외한 다른 엿새는 공간의 시간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이고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시간이고, 안식일이라고 하는 하루는 공간의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시간, 시간의 지성소를 만드는 것이고 지배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물론 공간의 지배라는 것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내가 깃들여 사는 것이지 내가 떠나면 내 지배 속에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지배한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공간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 속에 살면서 세계를 가꾸고 통제한다고 하지만 세계가 날 받아주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숨 쉬고 사는 것 자체가 내 이전에 내게 주어진(GIVEN) 것이기 때문에 선물(GIFT)입니다. 우리는 그 선물, 곧 은혜 가운데서 공간과 시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공간을 지배한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는 옳지만 절대적으로 옳은 말일 수는 없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이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뒷걸음쳐 되묻고 그 앞에 나를 드러내는 이런 행위라면 일차적인 의미는 나와의 관계입니다. 사물을 접할 때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등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배려, 곧 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주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다음 세대를 배려하고, 한국교회를 생각한다면 한국교회를 어떻게 돌보고 가꿀 것인가 고민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 뿐 아니라 삶을 업적주의에 흐름에 맡기지 않고 한걸음 물러서서 이레 가운데 하루는 비워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쉼으로 그 하루가 나머지 엿새를 풍요롭게 합니다.

신동식 : 한국교회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강영안 교수 "생각하지 않으면 우상을 섬기게 된다" ⓒ더보이스 이은창 


강영안 : 좁게 보면 교회 문제고, 크게 보면 근대문화의 문제입니다. 근대문화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틀입니다. 그에 대한 반성 없이 많은 것을 근대문화의 성과, 업적을 개 교회와 개인이 가져왔습니다. 성장주의라는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이 틀에서 하나의 우상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성장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지 성장을 목표로 그것을 위해 모든 걸 수단화시키는 건이 성장주의인데, 성장주의를 포함한 모든 주의는 잘못됐습니다.

하웃즈바르트가 그것을 잘 지적했습니다. 하웃즈바르트가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에서 안보주의, 복지주의, 경제주의 같은 주의에서 안보, 복지, 경제가 우상이 되면 나머지는 다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수단이 되어야 할 게 이데올로기화 되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돈은 수단으로서는 정말 소중한데, 돈이 목표가 되고 우상이 되면 인간의 삶을 해방시키기보다 억압하고 노예로 삼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간을 노예로 삼고 억압하지만, 참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이 목적을 설정해두고 그것을 섬기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욕망덩어리입니다. 명예, 국가, 민족, 교육, 복지, 심지어 교회조차도 우상이 되기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생각한다는 것은 제 1계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수많은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신동식 :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을 오랜 기간 섬겨오셨습니다. 기윤실 운동은 교회의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교회가 보다 더 교회답기 위해서 기독교 윤리를 추구하는 운동인데, 초대교회에 나타난 부흥운동을 보면 영적 회복을 통해 그 사회나 교회가 회복된 후에 기독교적 윤리가 뒤따르는 패턴을 보게 되는데요. 기독교 운동에서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강영안 : 한국교회에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전통 같은 것은 윤리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윤리는 간단하다. 한 시간만 배우고 훈련하면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윤리가 아닙니다. 원칙이고 생명입니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을 생명이라고 한다면 생명은 자라는 것 아닙니까? 자라는 것은 결국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복음의 생명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태어나지 않고 자라지 않는다면 윤리를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윤리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서 나무가 되고, 나무가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열매의 결과가 기독교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 말씀을 보면 빛의 자녀, 9절에 빛의 열매에 대해 나오는데, 어둠에서 빛으로 존재,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입니다. 그 변화에서 거두는 빛의 열매 착함, 의로움, 진실함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것이 열매로 드러난 것, 그것이 기독교 윤리입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변화된 다음 운동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독윤리실천운동 방향이 잘못된 게 아니라 운동 초기에서부터 줄곧 얘기해온 것처럼 목사들의 설교, 교인들이 바뀌면 기윤실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손봉호 교수님이 우리는 없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독인들이 윤리실천 운동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정말 빛으로 살고 열매를 맺는다면 기윤실 운동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존재변화가 안 일어나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고 중생하고 성령충만하면 우리가 삶의 중심에 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중심에 두고, 이웃을 먼저고, 내 자신이 마지막에 두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생긴다면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구원의 확신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삶의 근본적인 변화와 방향설정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윤리실천 운동이라는 걸 억지로 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신동식 : 그렇다면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건 교회에서 신앙고백적 신앙이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요?

강영안 : 신앙고백적 신앙이 없기 때문이죠. 신앙고백적 신앙을 좁혀서 사도신경에 국한해서 보면 “내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속성, 성품에 대해 진술하는 행위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순간에 그 안에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면 나는 그분의 자녀고, 성자 하나님 나의 구주시라면 나는 그분에 의해 구원받았고 그분의 종이 되며, 성령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하셨다면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해 신앙고백을 할 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 종, 백성으로서의 내 삶을 고백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신앙고백을 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오늘날 우리 삶이 여러 가지 체제,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자본주의에서 통용되는 성과주의, 소비주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시 들여다보고 분별하고 식별하는 노력이 지금 상황에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동식 : 교수님의 책 중에 에베소서 말씀에 관한 부분을 보면 목사의 사명이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사명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것으로 나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주장해 왔는데, 그런 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요?

강영안 : 저는 '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썼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단수형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지체들이 함께 하나로 뭉쳐 온전한 한 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 동격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히 이르기까지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장성한 분량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키의 크기까지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큼 크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입니다. 몸이 목표가 아니라 훈련시켜 섬기게 하고, 몸을 이루고, 성숙한 인간이 되게 하는데, 그 기준과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목회한다는 건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으로 어원을 보면 베드로, 야고보, 안드레가 고기 잡다가 그물 수선할 때 쓰는 동사와 동일합니다. 고기를 잡을 수 없는 성도들을 치유와 회복을 통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절에서는 ‘성불합시다’라고 인사합니다. 교회도 ‘그리스도가 됩시다’라고 인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모방하고 따라가는 것만 생각하는데, 그리스도가 되라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2장 6절에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할지니”라고 되어 있는데, 그 말씀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먼저 그리스도가 돼서 그리스도 모습을 보여야 하고, 성도도 그리스도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목사, 장로가 교회에 끼치는 영향이 무척 큽니다. 목사들이 변화가 없으면 성도도 변화가 없고 세상도 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 윤리 얘기하는데, 그건 윤리적 목회가 영적 목회고, 목사를 포함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신동식 : 교수님께서 쓰신 글 중에서 “이 땅의 기독교는 어떤 모습으로 커갔나”라는 글에서 윤치호 선생을 조명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요. 한국기독교의 변화가 윤치호 선생의 변질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기독교가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를 구원할 것이라는 초대교회의 기대가 급격하게 개인의 신상과 관련된 종교로 전락한 것이 가슴 아픕니다. 기독교가 시대의 조류를 이기지 못하고 순응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강영안 : 한국에만 있는 특이한 현상은 아닙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서양교회에서도 있었던 현상입니다. 윤치호 선생을 다뤘다고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는데, 윤치호 선생을 다룬 것은 한국기독교신앙의 실천의 방식에 전형적으로 영향을 준 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윤치호 선생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표적인 분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초기에는 민족과 자기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상당히 내면적인 구원의 경험도 있는데, 후에는 왜 변질되었을까요? 윤 선생이 변질한 것에는 민족적 동기도 컸다고 봅니다. 교육운동을 하면서 일본의 모든 지배에 동조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유혹 가운데 하나는 영향력을 얼마나 행사하려 하는가 입니다. 영향력, 파급효과, 결과가 중요하다면 어느 정도 제도적, 시대적인 것은 타협하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합니다. 그것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나중에 최남선, 이광수 같은 이들이 일본과 타협하는 것과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타협한 것입니다. 윤치호의 경우에는 그것이 교육이었습니다. 물론 민족교육을 위해 투신했지만 일본 협조를 받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윤치호 선생은 타협을 통해 민족교육에 기여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이 좀 나쁜 수단을 쓰더라도 좋은 목적일 경우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쉽게 빠질 수 있는 사고의 패턴입니다. 하나님의 선교, 전도, 교회 세우기 위해서 약간의 탈세를 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 갖지 않고 세상의 제도를 이용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좋은 동기에도 불구하고 불의현 현실과 타협하는 이유는 힘의 확대, 곧 영향력 때문입니다.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나와 타협할 수 없는 권력과 타협하는 경우 외에 또 다른 모습도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면서 9~10세기 되면 주교들이 수도원 출신들에서 다 나옵니다. 왜냐하면 세속 교구에서는 그럴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없고, 능력있는 사람들은 전부 수도원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수도원이 비대해지고, 권력화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베네딕트와 사막교구운동은 유명무실해집니다. 이 경우에는 영향을 미치기 위한 수단으로 힘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자기 권력화 되거나 세속화 된 것입니다. 두 경우는 교회사에서 자주 보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타자에 대한 존경" 
강영안 교수, "성도의 목표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② 


"동성애 문제는 타자와의 관계 문제"  ⓒ더보이스 이은창  


신동식 : 교수님은 개인주의와 다원주의에 기반을 둔 ‘현대’사회에서 문화는 취향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애 결혼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현대’사회에 편승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문화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요?

강영안 : 첫째는 동성애자 관련해서 20년 전하고 지금 비교해보면 사회적 이해와 관용도가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성과 결혼을 취향의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이성애는 타고난 것이고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필연성이라고 생각했던 데서 지금은 선택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그 선택은 취향을 바탕으로 합니다. 큰 변화입니다. 결혼도 과거는 부모들이 맺어주는 결혼에서 지금은 선택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둘째는 피부색깔 때문에 차별받는 문화에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피부색, 성, 종교, 지역, 학력 등 어떤 차이를 기초로 해서 어떤 차별도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때문에 권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빈다.

이 두 개를 결합시켜봅시다. 사회 속에서 내가 가진 차이(difference) 때문에 차별(discrimination)을 받는다면 그것은 나의 권리(right)가 침해받는 것입니다. 동성애 문제를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동성애 문제와 관련된 차별은 인종차별문제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 자명한 것입니다. 이 변화의 틀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그에 대해 대항하고 반항할 수 있었던 게 성경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도 오용될 수 있었습니다. 남아공이 인종분리정책을 쓰면서 노아가 함의 자손을 저주한 것을 인용합니다. 야벳 족속을 섬겨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억압받는 자 입장에서 성경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진 현 시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동성애가 금지되어 있다고 얘기해봐야 권위 갖지 않는 말로 들립니다.

세 번째, 동성애 뿐 아니라 이성애 경우에도 성이나 결혼 문제가 무조건 잘 되는 건 아닙니다. 이혼, 외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결국 동성애든 이성애든 우리안의 죄, 어둠의 힘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동성애를 이해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점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은 이해해야 합니다. 동성애 문제를 떼어놓고 보면 그것은 권리의 문제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도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의 관점에서 여전히 동성애가 잘못이라는 얘길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동성애자들을 교회에서 배척하거나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번 기윤실에서도 세미나를 했는데, 결론은 동성애는 죄지만 동성애는 사랑, 수용해야 한다는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당연시 될 경우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성적장애자만 배척하는가에 대해서 답해야 합니다.

실제 경험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같은 형제 자매로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종류의 죄를 범할 때 공동체가 계속 수용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럼 동성애는 또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고요. 지금 동성애는 문화적으로 촉진, 격려되는 상황입니다. 좀 더 철학적으로 보자면, 결국 타자와의 관계문제입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알러지 현상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존재합니다. 동성애자 관점에서 보면 대다수의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타자로 배제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동성애 자체만 보면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성에 대해 닫고 나와 같은 성에 대해서만 열리는 것입니다. 타자성에 대한 결핍증이 동성애 성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방식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동성애자 관점에서 보면 문화를 통해 자신들이 타자화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동성애자들의 동일한 것에 대한 추구는 타자에 대한 관계결핍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그렇고, 실제로 동성애자들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는 큰 도전입니다. 무신론, 다원주의, 배타주의와는 또 다른 도전입니다. 교회공동체가 그에 대한 분별의 노력이 필요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신동식 : 교수님은 개인의 존재성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해석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셨는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강령을 연상시킵니다. 성경은 개인이 ‘타인’과 어느 정도까지 어떤 연대를 지향하라고 말씀하고 있는지요? 다원적 상황에서 관계 속에서 타인의 얼굴에 대해 배려한다고 했을 때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잡으면 좋겠지만 종교다원주의 성향을 띄지 않는지요?

 

"타자에 대한 존경이 가장 중요한 가치다" ⓒ더보이스 이은창


강영안 : 종교다원주의가 아닌 인간다원주의입니다. 정치적, 윤리적 개인주의보다는 형이상학적으로 어떤 한 사람은 각각의 고유한 가치를 가집니다. 가장 중요한 건, 타자에 대한 존경입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 사람이면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포함해 기득권층은 아무도 없었고, 다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욕적이었던 세례요한의 사람들과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관점에서 존경을 구해야 하는 타자는 예외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적으로 이것은 잊혀진 사실입니다. 자기를 잊은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고, 저 사람은 죄인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님처럼 한다면 이 세상에서 배타적 타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이 배타적으로 대한 사람은 헤롯왕,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들이었다. 우리는 이런 걸 금방 잊어버립니다. 나도 예외는 아닙니다. 타종교의 경우는 조금 덜합니다. 동성애 당사자는 (타자에 대한) 존경의 대상이고, 타종교는 토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같은 타자들에 대해서는 질책할 수 있습니다.

애매한 것은 제주도 강정문제, 한미FTA, 한일군사동맹 같은 현실정치 문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입장을 보여야 하는가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면 정치 여러 측면들을 가지고 팩트가 뭔지를 놓고 뭔지 알아보는 게 필요합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하고, 행동이 필요하면 행동하면 되는데, 지금은 다 각개전투. 정치적 개인 성향에 따라 행동합니다. 지금 현재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의견의 통일, 진지한 토론이 전무한 상황입니다. 토론을 하는데 전제는 항상 팩트가 뭐냐는 것이고, 그리고 어떤 관점, 가치관에서 보는가 입니다. 다양한 가치관에서 계속 논의하고 분별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별과 판단을 대신해주는 게 언론의 역할인데, 언론도 각각의 관점을 갖고 있고 그 목소리가 너무 높아 대개 각각의 언론에 쏠림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사실이 뭔지를 끄집어내고 분별, 판단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그룹도 필요하고, 확산될 수 있는 매체, 여론을 형성해나가는 사람들이 필요한데 지금은 다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토론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현실화 되지 않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익명성 문제도 있고, 인터넷 언론만 보아도 그곳이 그리스도인들의 공간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서로에 대한 일말의 존경도 없이 내용도 말꼬리 잡기 일색입니다. 이게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인 것 같습니다.

신동식 : 소유하신 책이 1만권에 이를 정도로 독서의 양과 깊이가 상당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평소 독서습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성경은 어떻게 읽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강영안 : 책은 집과 연구실 다 합치면 1만 3천권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미국 가서도 800권 사왔습니다. 평소 신나게 책을 보고 있지만 막상 강의가 시작되면 책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책 볼 때 상당히 집중하는 편입니다. 연구와 관계없이 최근에 읽은 책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산지는 오래되었는데 통독을 못하다가 지난주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읽었습니다. 오늘 읽은 책은 예일대 미로슬라프 볼프 교수 <배제와 포옹 exclusion and embrace>입니다. IVP에서 번역되어 나올 예정입니다. 이런 책들은 한가하게 읽은 것들입니다. 지하철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제일 한가한 곳입니다. 신학 서적들이 제일 읽기 쉽고, 제일 어려운 책은 철학책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는 한 두 페이지도 읽기가 어렵습니다. 원래 소설책을 참 좋아하는데 요즘은 소설책 읽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프란시스 쉐퍼 목사님처럼 최소 1년에 두 번, 6개월에 한 번씩 맥체인 표를 가지고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맥체인 표를 가지고 읽는 것 보다는 거의 매주 한 권을 정해서 쭉 읽어 내려가는 방식으로 읽고 있다. 학교에서 읽는 책은 볼프 책으로 주로 서서 읽습니다(연구실에 서서 읽는 독서대가 있다). 한 달에 두 번은 설교해야 되니까 성경은 복음서 위주로 많이 읽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텍스트로 6번 설교했는데, 설교하고 나니 벌써 원고지로 75매가 되었습니다. 올 연말까지 설교가 다 끝나면 엄청난 분량이 될 겁니다.


강영안 교수가 서서 읽는 독서대가 교수실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더보이스 이은창 


신동식 : 교수님은 성경관은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강영안 : 나는 축자영감설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신국원 교수는 그때는 일단 축자영감설을 믿는다고 말하고 시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웃음) 나는 축자영감설을 믿는 것은 성령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건 유기적 영감설입니다. 성경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은 역시 성령 하나님의 역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글자를 읽는다 하더라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말씀과 성령을 잊어버리고 둘 중 하나만 내세우는 건 잘못되었습니다. 성령은 항상 말씀과 함께하고, 말씀은 항상 성령과 함께 합니다.

칸트나 하이데거, 레비나스 같은 철학이 사람들에게 지적인 깨달음을 주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철학자가 사람을 바꾸는 걸 본적이 없을뿐더러 믿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바꾸는 건 하나님 말씀입니다. 간혹 목사님들도 성경을 읽어놓고 엉뚱한 소리 할 때가 있는데, 성경의 능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기의 지혜를 믿고 그걸로 어떻게 어필해보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 인터뷰를 보니 옛날 목사들은 성도들을 울음바다로 만드는데 요즘 목사들은 성도들을 웃음바다로 만든다고 합니다. 재밌는 지적입니다. 요즘은 웃기고 재밌어야 은혜 받았다고 하지,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게 만들었다가는 나무라는 것으로 듣습니다.

신동식 : 학문의 길을 걸으려는 청년대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소양은 무엇인가요? 신앙과 지성을 통합하려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국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 취하는 편의주의로 흐르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교수님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요?

강영안 :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자기가 하는 전공은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게 요리든, 인문학이든, 철학이든, 정치학이든 뭐든 간에 할 수 있을 만큼 탁월하게 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공부 철저히 해야 합니다. 둘째는, 신앙이 확고한 사람들과 긴가민가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나는 신앙을 통해 학자로 생활하는데, 신앙이 학업에 불리했다기보다는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학업에 훨씬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어떤 공부 주제를 정할 때 신앙이 심리적 안정을 주었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방향, 주제까지 신앙이 유익했습니다. 학자로써 뿐 아니라 어떤 전문적 직업을 가지던지 간에 필요로 하는 게 긴장과 집중인데 신앙은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전문 직종에서 주어진 전문 분야의 일을 할 때 신앙은 방향타가 됩니다. 혹시 신앙 때문에 망설인다면 분명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감정적이거나 교제, 찬양, 어울림에 머물지 말고 청년 때일수록 훨씬 더 많이 생각해서 지적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가능한 한 많이 읽어서 무엇을, 왜, 누구를, 내가 믿는지, 어떻게 해야 제대로 믿는지를 분명히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신앙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방향타가 될 수 있습니다. ‘제발 공부 좀 합시다’라는 당부를 하고 싶습니다. 공부(Study)가 중국어로 ‘애쓴다’라는 뜻으로 라틴어로도 같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동서양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공부의 의미처럼 애쓰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업적주의와는 좀 구별해야 합니다. 그 애씀은 결국 그걸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삶의 목표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공부 할 것이 잔뜩 쌓였는데 속도는 예전보다 느려진 것 같습니다. 읽고 나면 쉽게 잊어버리는 게 힘듭니다.

신동식 : 역사적, 신학적 개혁파 신앙이 한국교회에 유효하다고 보는지요? 또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개혁파 신앙이 대안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주의 안에서 성경의 절대 권위가 무너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교수님의 앞으로의 계획도 듣고 싶습니다.

강영안 : 개혁파라는 말을 즐겨 쓰고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현재 많은 것 같습니다. 개혁파, 개혁주의의 정의는 약간 다릅니다. 누가 말하길 한 개혁파 운동하는 곳에 갔더니 목사가 설교를 위해 단상에 오르기 전에 장로와 악수하고, 설교 후 장로들과 토론하였다고 하더군요. 내가 개혁주의 전통에서 배우고 읽고 한 바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그게 삶의 모든 일상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거룩하게 하는 것은 어느 한 치도 하나님이 내 것이라 하지 않은 부분이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먹든지 자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주되게 하는 삶이 우리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철학적 작업 가운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일상에 대한 기독 철학적인 논의를 계속 해나가는 것입니다. 좀 더 학문적 활동이라면 20세기 후반 유럽대륙의 종교철학 전통. 초반에는 기독교에 대한 반기독교적인 흐름이었다가 후반에 오면서 친기독교적인 성향을 가진 철학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유대교인지만 레비나스. 카톨릭 쪽에는 마리옹, 그레티앙,개신교 쪽에는 볼리크, 미셀 앙리가 아주 중요한 유럽의 철학자들이었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작업하고 미국 쪽에 윌리암 올스톤, 월터 스토프. 플라팅카 같은 개혁주의 인식론철학자들의 작업을 어떤 방식으로 통합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를 해 보고 싶습니다. 실현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작업 해놓은 걸 연구하기보다 내가 새롭게 작업 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곧 지금 해야 되는 게 있다.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라는 책 제목은 사실 지금 나와야 될 책 제목인데 먼저 사용되었습니다. 곧 나올 책의 제목은 ‘그리스도인, 어떻게 생각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스도인, 무슨 소망을 가질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입니다. IVP하고 약속이 되어 있는데 아직 원고를 못 넘기고 있습니다. 사도신경 두 번째 책 쓰는 것도 있고, 주기도문에 관한 책 요청도 받았습니다.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모두 쓰게 되었는데, 조금 더 한다면 칼빈의 기독교 강요도 할 거 같습니다.(웃음)

신동식 : 귀한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