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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실, 소박한 일상

행복을 찾아가는 윤리 실천 -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2006. 11. 22

기윤실 윤리 스터디 과정의 하나로 김대오 교수님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서양의 윤리학은 크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과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학의 두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그 두 흐름 중 하나를 형성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쉽고도 재미있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최고의 선은 행복(living well)인데 개인 각자의 선들의 최종 선은 공동체적인 선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공동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공동의 선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공동의 선이 모든 개인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선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한데, 최고의 선은 각 존재가 갖는 고유 기능(arete)을 발견하고 그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때 가능하다. 즉, 인간으로서 갖는 기능을 발견하고 그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때 인간은 최고의 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능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은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기능에 집중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의도에 온전히 부합하는 삶이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 인간의 기능은 육체적인 것에서는 찾을 수 업소 정신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 육체적인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추구하는 것이므로 인간만의 고유 기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인간의 기능은 ‘도덕적(성경저) 덕’과 ‘지성적 덕’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것을 잘 발휘, 즉 행위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덕을 어느정도 발휘하는 것이 최선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 최선의 기준이라고 제시한다. 예를 들면 ‘용기’가 중용의 상태인 최선이라면 ‘비겁함’은 부족한 상태이고, ‘만용, 객기’는 넘치는 상태이다.

기윤실에서 철학과 윤리를 공부하는 과정은 워낙 철학에 문외한인 내게는 버겁고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이 학문의 첫 시작이라 할 만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귀한 경험이다.
특히, 의무에 의한 윤리적 실천이 아닌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한 윤리적 실천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할지 많은 성찰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