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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그리스도인/자발적불편운동

[자발적불편운동 레터02] 기독교인의 생활실천운동(손봉호 자문위원장)

기독교인의 생활실천운동

손봉호 자문위원장(기윤실, 고신대 석좌교수) 



최근 우리 나라에는 6.25의 비극적 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사회적으로 몹시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염려스러운 것은 사회가 도덕적으로 황폐화 되어 가는 징조들입니다. 이제는 너무도 흔해빠진 일처럼 되었지만, 사실 소름이 끼치는 인신매매를 비롯해서, 어린이 강간, 대낮의 강도사건, 집단폭력조직, 그리고 히로뽕이 청소년에게까지 번져 가는 일 등, 참으로 말세적인 사건이 매일 우리의 신문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보다도 더욱 걱정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분들의 도덕적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믿을 수 없는 행동은 이젠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더욱 서글픈 것은 도덕적 권위가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인이나 교육자의 비리도 드물잖게 보도되는 현실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예수를 모르는 세속적인 삶의 본 모습이요, 또한 그렇게 돌릴 수 있다면 그래도 덜 걱정이 되겠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서만은 아직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절망적으로 썩어 가는 이 시대를 향해서 희망을 주고 있습니까? 슬프게도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최근까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각종 비리사건에 그리스도인이 개입하지 않은 사건이 한 가지라도 있었습니까? 어떻게 기독교인이면서 세상 사람도 놀라는 엄청난 비리를 저지를 수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 신구교도를 합해서 일천만이나 된다는 나라에서 사람임을 부끄러워할 만한 부도덕한 사건들이 그렇게도 많이 일어나는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우리의 선배 기독교인 세대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3.1운동 당시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은 이십만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가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도덕적으로도 인간성 개조운동을 주도했습니다. 6.25 전까지만 해도 사회복지 활동을 비롯해서 이 민족을 각성시키는 사회교육의 견인차의 역할을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은 해방 전에 비해 50배가 넘을 만큼 숫자로 볼 때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보다 기독교적인 삶의 영향을 받아야 될 터인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바로 이 점이 기독교계의 대각성운동을 절실히 요구한다고 하겠습니다. 그 길 밖에는 이 민족이 살아 번성할 수 있는 길이 달리 없습니다.

다행히도 기독교계에는 요즘 수적 부흥 못지 않게 영적으로 성숙된 그리스도인 운동이 일고 있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도 우리의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기독교인이 진실로 기독교인이고자 하는 운동이라고 하겠습니다. 회원 중에는 이 운동이 보다 활발하게 발전되기를 바라는 분이 많은 줄 압니다. 너무 부진하다고 염려하는 분도 상당히 있을 줄 압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운동은 요즘 여러 분야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구호와 외침의 운동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실천운동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운동이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모이면 누구나 기독교인의 생활방식이 그리스도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래야 기독교인이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은 말씀 듣기를 좋아하고 예수 믿고 축복 받기는 갈망하고 기도생활은 많이 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라서 생활하는 것은 잘 못한다는 평을 듣습니다. 아마도 구원이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너무 강조한데서 이런 잘못이 생긴 듯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잘 외웠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별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생활화하는 훈련이 별로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생활을 하려면 적어도 수 년 동안의 공동체 생활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 년 가지고 되겠습니까? 사실을 말한다면 수 년 동안 집중적 훈련을 받고 그 후에는 일생동안 스스로 훈련하는 생활을 해야겠지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께서도 최종 목표를 향해서 계속 노력하는 경주자로 비유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실천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훈련을 소홀히 했던 것이 유감스럽지만 사실입니다. 우리의 윤리실천운동이 구호운동이 아니라 진실한 실천운동이 되려면 실천 훈련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실천훈련을 위해 몇 가지 구체적 제언을 하고자 합니다.

우선 변화하고자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육신적인 욕구나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런 생활 속에서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이나 느끼는 것, 행동하는 방식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위주의 방식으로 습관화되게 됩니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기를 원합니다. 이런 욕구 때문에 자연스럽게 좋은 옷도 입고 싶고, 좋은 집도 가지고 싶어합니다. 이렇듯 자연스럽게 우리의 욕망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지요. 이런 생활 속에서 만족도 찾고 성취도 추구하면서 이런 삶이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만일 이런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예수님의 생활 방식을 배우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자기위주의 생활 방식을 버리라는 것은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게다가 새로 배워야 할 예수님이 가르친 삶의 방식이 우리 자신을 버려야 갈 수 있는 길이요 세상적 지혜로 볼 때 어리석은 삶이라고 한다면 자기위주의 삶을 절대로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방식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일생 일대의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결단은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아무 공로 없이 구원받았다는 믿음의 고백 없이는 불가능한 결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바로 이런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성경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수용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신앙이 깊어져서 놀라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드러낸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말씀을 통해서 인간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무한함을 깊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듯 나의 구원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 고백이 날로 생생하게 체험 될 때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결단이 굳어질 것입니다. 이런 지속적인 결단이 필요한 것은 이미 언급했고 앞으로도 언급하겠지만, 예수님 뜻대로 우리의 삶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많은 방해와 어려움이 따르는데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변화를 방해하는 요소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단한다고 해서 바로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은 부단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습관을 바꾸려면 노력 없이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습관화되기 위해서는 일만 번 이상의 실습이 필요하다고 심리학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위주의 습관을 버리고 주님의 삶을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려면 하나 하나의 생각과 행동을 일만 번 이상 실습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꾸준한 생활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꾸준한 훈련의 방해꾼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가장 큰 방해꾼은 우리의 육체적 욕망과 나를 자랑하고 싶은 자존심의 욕망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이 싫든 좋든 세상을 사는 동안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후에도 이런 인간적 욕망이 세상 떠날 때까지 우리와 한께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욕은 내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고 세상에서 귀하다고 하는 것을 쓰레기로 여긴 이후의 고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육신적 욕망의 도전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고뇌를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극복합니까?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도 바울을 만나면서, 또 한번 구원의 생생한 감동만이 이런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다음에 인간관계에서 오는 압력이 방해가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생활을 합니다. 사회생활 속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행동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동조현상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전문가일 때, 그리고 내가 자신감이 부족할 때 우리는 특히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르기 쉽습니다. 이런 동조행동은 믿음이 작은 사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같은 거물 사도도 위선적인 행동을 따라 하다가 바울에게 책망 받은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광고, 소비 및 유행이 사람들의 안목의 자랑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안목의 자랑이 화젯거리가 되곤 합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인의 생활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의 일반적 흐름에 동조하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가 않습니다. 상당한 소외감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기쁨이 없이는 동조행동의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부당한 명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명령은 일반적으로 강제성을 띠기 때문에 부당한 명령일 때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보상을 주는 명령이나 전문가의 이름으로 명령할 경우, 그리고 합법성을 가지고 명령할 경우 쉽게 복종하게 됩니다. 이런 명령이 주님의 뜻과 어긋날 때 이를 거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생활훈련을 위한 몇 가지 구체적 고려 사항을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생활한다는 것은 참으로 좁은 길로 가기를 결단하는 삶의 연속이라고 하겠습니다. 앞으로 윤리실천 훈련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개발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윤리실천운동이 기독교인의 생활화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길을 갈 때만 이런 윤리실천운동이 참으로 이 나라의 미래에 희망을 주는 운동이 될 것입니다.

* 원출처 : 기윤실 소식지 제9호 / 발행일 : 1989년 7월 25일 / 발행처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 본 글은 2012년 기윤실 자발적불편운동을 위해 1989년 당시의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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