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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실, 소박한 일상

“주여, 살려주시옵소서.” 옥한흠목사 - 2007년7월8일 평양 대부흥 100주년 기념 설교.

2007. 9. 3

지난 2007년7월8일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여 설교한 사랑의교회 원로목사이신 옥한흠목사님의 설교를 요약해서 올립니다.

(* 조금 시간이 지났지만, 아프간 사태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어떻게 이 시대의 요청에 응답해야 할지에 대해 귀한 성찰적 메세지가 있다고 생각되어 올립니다.)

복음을 받아 들인지 반세기도 되지 않은 100년 전 한국 교회는 믿는 사람이 3,4 만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약한 한국교회를 하나나님께서는 특별히 찾아오셔 성령의 불을 부어주셨습니다. 원산에서 시작된 성령의 불길은 평양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연이어 한반도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러자 수년 사이에 수십만명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평양 대 부흥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함께 강력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백년 전 부흥을 다시 사모하며 기다릴까요? 가장 절박한 이유는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다시 사는 것은 우리 안에 더러운 것들을 다 쓸어내는 회개 밖에는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는 오늘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게 합니다. 사데 교회는 한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며 오랫동안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데 교회는 주님의 눈에는 행위의 온전함을 찾을 수 없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행위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며,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입니다. 기적 같은 부흥을 가진 한국 교회는 겉으로 보면 절대로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데 교회와 같다는 불안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이 사회가 한국교회를 너무 불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의 도덕성, 가치관, 처세관을 보면 세상 돌아가는 쪽으로 더 많이 기울고 있고, 세속주의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평양 백주년의 진정한 기념은 영적인 비참함을 직시하고 가슴을 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또한 사데 교회를 보면서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일곱별을 손에 준 예수님께서 행위가 죽은 교회의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가르쳐야 합니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는 진리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의 진가는 순종하는 행위로 검증받는 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라면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면서 믿음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열매가되는 행위를 등한시 하거나 무시하면 입만 살고 행위가 죽어버리는 사데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0절을 보면 바울은 유익한 말씀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가르쳤다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바울의 용기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평양 대 부흥의 진정한 기념은 복음을 변질 시킨 죄를 놓고 가슴을 치는 목회자들의 회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은 행위가 죽은 사데 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회개만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답답한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회개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고, 세상 앞에 새 옷을 갈아입으려면 성령께서 회개할 힘을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백 년 전과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강림하셔서 아낌없이 부어주셨던 성령의 불, 회개의 영을 부어 달라 힘을 다해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의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