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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받는 교회/자살예방운동

자살에 대한 교회의 대책 (조성돈 본부장)

자살에 대한 교회의 대책

 

글 _ 조성돈 본부장 (교회신뢰운동, 실천신학대학원 교수, 자살예방센터Lifehope)

 

 

‘자살은 사회적 질병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하루 평균 33명의 국민이 죽어야하는 이유가 이것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이 사회는 분명 그 구성원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해야하는 그 이유를 풀어야한다. 이것은 국민보건의 문제이고 국가적 대책이 필요한 사회적 질병인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전염병이 돌아도 온 국가가 나서서 그 병을 막으려고 노력을 하는 장면을 뉴스를 통해서 보게 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러한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은 불과 몇 명에 불과하다. 일례로 광우병이 인류의 재앙처럼 보였지만 진작 죽은 사람은 아직 10명도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자살로 죽은 사람이 2007년에만 12,174명이다. 이제 이것은 이 사회에 항존하는 사회적 질병이다. 이 질병으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야한다. 자살은 분명 막을 수 있고 또 막아야만 한다. 천하보다도 귀한 한 생명이 잘못된 선택으로 죽어야하는 일은 분명 막아야한다. 이 시대적 사명에 교회가 부름을 받아야한다. 이 사회에서 생명의 가치를 담고 있는 마지막 보루로서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 맡겨놓을 수 없는 교회의 소명이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이 일에 나서야하는 것이다.


자살에 대해서 언급한 고대의 자료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이다. 그는 신국론에서 자살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자살은 자신을 죽이는 살인행위로 보았다. 그래서 ‘네 이웃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을 보았다. 비록 자신의 생명이 그 스스로에게 있는 것 같지만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므로 그 선택권마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는 행위인 자살마저도 살인행위로 본 것이다. 특히 그는 일시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생명을 포기할 권리 역시 인간에서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서 교회는 563년 브라가 공의회와 580년 오세르 성직자 회의에서 모든 자살자를 처벌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Summa Theologia)에서 자살에 반대하는 세 가지 이유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첫째 그는 만물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자살은 이러한 자연적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공동체에 속한 일원으로서 자살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손해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해 주신 선물이기에 인간의 마음대로 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과 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아퀴나스의 견해는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에 있어서 그 특별함이 있다.

 

이런 자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은 중세에 들어서면서 과격한 양태로 변한다. 자살한 자에 해서 장례를 치러주지 않는 것은 물론 교회의 묘지에 묻히지 못하게 함으로써 죽어서도 교회의 공동체에 속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죽은 시체에 대한 재판이나 형벌도 가해졌다. 시체를 나무에 매달거나 물에 빠뜨리기도 했고, 파리나 보르도에서는 시체가 보이도록 그물망 같은 것에 사체를 담아 길을 끌고 다니기도 했다. 그 외에도 공개적으로 글을 옮기기에도 끔찍할 정도의 시체에 대한 훼손과 가해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관행들은 자살한 자의 종말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감히 자살을 생각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역할을 분명 했을 것이다. (이진홍: 자살)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좀 다른 견해를 보였다. 자살을 하는 것은 성령훼방죄라고 보았던 중세적 견해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성령훼방죄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서 10장 29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행동을 말한다. 즉 자살을 성령훼방죄로 보는 것은 죽기까지 자살이라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이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으로 보고 회개함이 없이 죽었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루터, 푸치우스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은 이러한 견해가 비성경적인 교리로 거부하였다. 자살이 성령훼방죄에 들어간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원: 자살과 기독교)

 

물론 이러한 신학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자살자가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평민들에게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사탄이 이 가르침을 이용하여 더욱 더 많은 살인을 자행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신학적으로는 자살자가 지옥에 간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말을 함으로 평신도들이 시험에 들 수 있으므로 이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루터의 견해인 것이다.

 

그런데 아직 한국교회에서는 중세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단정적 태도가 자살에 대한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 가톨릭 교회에서 조차도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의 논리에 따라서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지 자살을 지옥과 연결 짖지는 않았다. 그런데 개신교가 중세적 전통을 못 벗어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구약이 신약의 조명에서 재해석되어져야 하듯이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의 전통은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다시 해석되어져야한다. 특히 개혁적 전통이 담지하고 있는 성경의 권위에서 그 해석은 검증되어져야하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에 따라서 우리의 이해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루터의 이해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자살자들이 성령훼방죄를 저지렀다는 견해는 비성경적인 교리라는 것이다. 즉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께로 넘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성경에는 자살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없으므로 인간이 그 구원까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선 목회자들이나 소위 보수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분들은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것을 우리 개신교의 교리로 신봉하고 있고 자살한 사람은 신앙이 없다는 것으로 단정한다. 이러한 이해에서 자살은 질병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가 되고, 우울증은 치료가 아니라 치유되어야할 신앙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는 자살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 어려우며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데 있어서 그 근본이 세워질 수 없다. 필자가 만나본 적지 않은 분들은 이러한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살을 막을 수가 있을 것인가를 걱정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약 500년 전 루터의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실제적으로 목회와 신학의 도움으로 목회사회학연구소에서 행한 설문조사에서 기독교인 85.1%는 ‘자살은 신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신과적인 질병으로 보아야 한다’고 답을 했고 68.7%는 교회에서 자살한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보여주었다. 즉 자살에 관해서 우리 평신도들의 의식은 이미 상당히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은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인 것이다. 하루빨리 한국교회는 자살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