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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그리스도인

[비전메시지] 기독교윤리, 정답이 아닌 갈등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자(정병오)

[비전메시지] 기독교윤리, 정답이 아닌 갈등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자(정병오) 


기독교윤리, 

정답이 아닌 갈등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자


정병오 위원(상임집행위원, 아현산업정보학교 교사)



대학 졸업 직후 한 중학교 도덕 교사로 근무할 때였다. 그러지 않아도 학교 안에서 ‘선생님’이란 호칭을 들을 때 내 몸에 맞지 않는 호칭을 듣는 듯해서 어색했는데 출퇴근 길 학교 밖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는 더 어색할 때가 많았다. 특히 아이들이 그냥 “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면 될 것을, 꼭 “‘도덕’ 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할 때는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얼굴이 발개지곤 했었다. 이 때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에서 나는 두 가지 무언의 메시지를 읽곤 했었다. 하나는 ‘아니 저 사람은 얼마나 도덕적이길래 도덕 선생님을 하는 거야?’였고, 또 다른 하나는 ‘아니 저렇게 새파란 젊은이가 도덕 선생님이란 말이야? 도덕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이 든 훈장님 같은 분이 하는 줄 알았는데…’였다.


일평생의 삶을 통해 도덕적으로 고결한 삶을 살아온 사람만이 도덕을 논하고 가르칠 자격이 있으며, 그렇게 할 때에 도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도덕교육의 상식이다. 하지만 이 말이 과도하게 강조되고, 또 다른 면이 함께 고려되지 않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을 자신들과는 거리가 먼 일부 사람들의 것으로 취급하게 만든다. 그래서 열심히 도덕의 높은 이상과 고결한 도덕적 삶을 살았던 모범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그에 대해 동의하고 그 사람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실제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지 않아 실제 도덕교육이 잘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중고등학교에서 20년 이상 도덕교육을 실시하면서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은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백지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도덕적 문제로 내적인 갈등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갈등 문제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도덕과 관련한 내면의 깊은 갈등과 고통의 소리를 무시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지내며 그냥 욕망이나 주변 분위기를 따르는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도덕 수업에 임하면 “선생님, 도덕 배우면 뭐해요?” “선생님, 도덕이라는 것이 길 지나가다가 휴지가 떨어지면 주우면 되는 상식 아닌가요? 그런데 선생님은 도덕을 뭐 이렇게 어렵게 설명하려고 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물론 이러한 질문은 아이들의 구체적인 삶과 동떨어진 학교 도덕 교육과정이나 수업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덕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보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러한 아이들의 질문에 대해 나는 “얘들아!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조물주(창조주)가 심어주신 도덕법칙이란 것이 심어져 있어. 그런데 우리가 부딪히는 현실에는 이 법칙을 바로 적용시켜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도 있지만, 여러 현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바로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도 많아. 도덕 수업이란 것은 우리가 부딪히는 많은 복잡한 도덕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심겨진 도덕법칙을 적용하여 해결책을 찾는 것는 것을 연습하는 거야.”라고 답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나이 때 겪는 도덕적 갈등 문제를 예시로 제시하고 소그룹 토론을 시킨다. 각 소그룹이 그들 나름의 도덕적 해결책과 이유를 제시하면 나는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한 다른 면들을 제시하며 그 부분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각 소그룹들이 나의 반론에 답을 하기 위해 답을 찾는 과정을 거치다보면 처음에 다른 의견을 제시했던 소그룹들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거나, 혹은 해결책은 다르다할지라도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어떤 원칙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수업을 반복하면서 아이들 가운데서 도덕적 사유와 성찰,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처한 사람들 사이에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공통적이 도덕적 원리를 찾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도덕교사로서의 경험에 기반해서 나는 오늘날 기독교윤리실천 운동 역시 기독교윤리에 대해 일방적으로 가르치기보다는 성도들이 자신의 삶 속에 느끼는 기독교윤리적인 갈등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데서 시작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해 본다. 물론 기독교윤리는 일반 윤리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내 상황이 어찌하든지 이를 극복하고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이고 어떻게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오늘날 성도들이 매일의 삶에서 부딪히는 기독교윤리적 갈등 상황은 2천년에서 4천년 전에 쓰여진 성경의 말씀으로 단순하게 적용할 수 없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제일 많이 고민하는 전세난으로 인해 살 곳을 찾아다녀야 하는 문제, 저축이나 절약만으로는 재산을 모으기가 쉽지 않고 부동산이나 금융상품을 통한 재테크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 자녀들이 겪어야 할 과도한 입시경쟁의 상황에 부모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사교육은 어디까지 활용이 가능한지의 여부, 취업을 할 수 있다는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달려들 정도의 취업 상황 등의 문제에 대해 성경의 원리를 적용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이러한 문제는 마치 성경과 무관한 것처럼 시대를 따르거나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갖고 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설교자들이 말씀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풀어 설교를 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 그리스도인이 답을 줄 수 있다. 나름의 원칙을 따라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헌신된 사례도 있다. 이 모든 노력들이 다 필요하고 귀한 노력들이다. 하지만 이에 더하여 평범한 성도들이 모여서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서 자신은 어떻게 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 가운데 자신이 겪는 갈등은 무엇이고, 또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마련해 보면 어떨까? 이러한 자리에 설교자들이나 각 분야의 전문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참여하되, 정답을 제시하는 방식이 아닌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도와준다면 논의는 더 풍성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자리가 활성화되면 우선 기독교윤리실천 운동이 성도들의 일상의 영역, 구체적인 윤리적 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운동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명망가나 전문가들의 운동이 아닌 일반 성도들의 운동으로 편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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