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께 이루는 하나님 나라

기독교윤리실천학교 준비를 위한 기윤실 내부 워크숍 - 발제1(손봉호 자문위원장)

2014년 세월호 참사로 드러나 대한민국의 윤리수준은 윤리운동 단체인 기윤실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낮은 윤리수준에 기윤실이 책임감을 갖고 시민들의 윤리수준 향상을 위한 교육과정을 개설하기 위해 준비중에 있습니다. 그 준비의 과정으로 지난 3월27일(금) 손봉호 자문위원장과 신원하 기독교윤리연구소장을 모시고 내부 워크숍을 가졌습니다. 손봉호 자문위원장의 발제 녹취록을 공유합니다. 앞으로 기윤실의 운동과 기독교윤리실천학교에 많은 관심과 응원부탁드립니다. 


기독교윤리실천학교 준비를 위한 - 기윤실 내부 워크숍 발제1

손봉호 자문위원장 발제 녹취록



윤리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 기독교 그리고 현대의 윤리는 관계의 문제다. 과거의 윤리는 관계를 강조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윤리의 문제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위 미덕 그리스의 4대 미덕, 이런 것을 얼마나 갖추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쏟았다. 칸트는 이 세상에 선한 것은 하나뿐이다. 선한 것은 의지 하나뿐이다. 목적이나 결과가 아니라 선하게 의도하는 그것만이 선이다라고 했다.


윤리에 대해서 자신이 어떻게 훌륭하게 되고 내가 얼마나 착하고 선한 행위를 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는 잘못됐다 생각한다. 윤리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과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가 아니다. 철학자 니그렌은 이런 윤리를 주장했다. 이제까지 윤리는 윤리가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내가 윤리를 타자 중심이라고 생각한 것은 레비나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윤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다.


왜 한국 사람들은 불행하냐? 더 편리하고 부유해지고 발전했는데 왜 더 불행해지느냐?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경쟁이다. 상대적 박탈을 느끼게 하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도덕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옛날엔 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시간이 많아서 자연에 의해서 삶의 질이 결정됐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자연에게 의존하는 것이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에 의해서 삶의 질이 결정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윤리적 수준이 낮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덕을 보느냐 해를 보느냐 이것이 윤리다. 윤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극적이다.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윤리다. 적극적으로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윤리는 그 수준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윤리의 핵심이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행해진다. 예를 들어 거짓말은남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말만 비윤리적이다. 해를 끼치지 않는 거짓말은 비윤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내가 약자 중심의 윤리라고 강조하는 것은 보통 해를 당하는 대상은 약자이기 때문이다. 약자가 억울함을 당하고 해를 당한다. 강자가 해를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교통질서가 무너지면 탱크 운전수는 손해가 없지만 자전거나 작은 차를 타는 사람들이 손해를 본다. 해를 끼친다는건 약한 사람의 권리를 뺏고 억울하게 하는 것이다. 윤리는 궁극적으로 정의로 환원된다.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고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정의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같은 권리를 누려야 하는 것인가? 기독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도 그리스 시대에 시작됐다는 것은 형식적이기만 했다. 그때에는 여자나 노예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그것은 온전한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생각해야한다. 철학에서 인간의 기본 인권을 어떻게 정당화 하느냐가 고민이다. 예전에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기본인권이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사람의 이성이 흔들렸다. 인간의 기본인권을 정당화 하는 것은 기독교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기본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기본인권사상은 기독교적인 사상이다. 유엔대사였던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기본인권사상은 유대 기독교적 전통의 세속적인 예라고 말했었다. 비기독교인 무슬림들도 기독교의 기본인권사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 인권을 갖고 있고 권리를 존중해야한다. 그것을 침해하고 파괴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가? 내 이익을 위해서 내가 덕을 보기위해 욕심. 탐욕을 갖기 때문이다. 비윤리적의 행위의 근저에는 욕심이 깔려있다. 성경에서 분명이 이야기한다. 욕심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안전보장을 믿지 못하는 죄이다.


예로 가인이 ‘만나는 자마다 모두 죽이겠다’ 하나님을 못 믿고 자신이 자신을 지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류문화의 시작도 나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인간의 행위였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와 무기를 만들었다. 


탐심은 우상숭배다. 탐심을 줄이지 않고서는 윤리적이기 어렵다. 탐심을 절제해야 한다. 성경용어 사전에서 절제라는 단어를 보면 성경이 말하는 절제와 헬레니즘이 말하는 절제는 차이가 있다. 헬레니즘이 말하는 절제는 자기를 위한 절제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절제는 이웃을 위한 절제, 이웃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절제다. 자발적불편운동도 그런 절제운동이라 할 수 있다. 내 건강이나 나를 위한 절제는 윤리적인 요소가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절제하고 양보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절제이고 윤리이다.


윤리 어원이 모두 관습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상당히 사회적인 요소다. 한국사람이 부정직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부정직한 것이다. 똑같은 사람이 일본에 가면 정직해지고 한국에서는 부정직하게 된다. 윤리적이 된다는 것은 나만 변화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구성원 가운데 약자들이 얼마나 손해를 보는지가 중요하다. 내 자신이 약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약자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약자의 고통과 관계되는 모든 것은 윤리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기윤실이 하는 운동의 사회 윤리적 수준을 높임으로 약자의 고통을 줄여야 한다.


2015/05/14 - 기독교윤리실천학교 준비를 위한 기윤실 내부 워크숍 - 발제2(신원하 기독교윤리연구소장)




 



♡♡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OnAir 기윤실"을 구독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