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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실, 소박한 일상

조나단 에드워즈와의 만남


2006. 12. 19

  조나단 에드워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전날 저녁에 있었던 기윤실의 큰 행사는 간사인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행사 자체의 의미 때문에 지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천안에 계신 교수님을 뵙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양낙흥 교수님(고신대학원)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계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문가로 강의교재인 “체험과 부흥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 전반을 다룬 책이기도 하다.

  종교의 특징은 내세, 영혼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윤리, 정치 등은 모두 현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종교가 현세적인 것에 전혀 무관심한 것도 문제겠지만, 종교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내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가 부흥한다. 기독교가 부흥한다 라고 했을때의 사람들의 관심은 내세, 구원, 영혼 등 구원론과 관련된 관심의 증폭이다. 종교개혁은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이신칭의) 내세와 관련된 실존적인 문제제기라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이후 17세기 초에 유럽을 휩쓴 30년 전쟁기간동안 평온했던 영국의 청교도들은  “나에게 믿음이 정말 있는가?(Saving Faith), 나는 택정 받은 자인가?”에 대한 내면적인 물음, 즉 영혼구원에 다시금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이러한 회심의 체험을 강조하는 흐름은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에 의해 영국의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그 영향을 많은 미국의 많은 성도들은 감정적으로 뜨거워지고, 영적인 체험이나, 회심의 강력한 체험을 갈망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보는 미국 장로교회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는데, 하나는 영국 청교도처럼 체험적 신앙에 관심을 두는 열광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처럼 순수한 교리 정립에 치중한 합리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견해의 차이에 의해 구파와 신파로 갈라져서 논쟁을 시작한다.
  이 논쟁은 부흥운동을 감정주의라고 비판하면서 감정(정서; affection)을 아예 무시해 버리는 부류와 또 너무 감정을 과신해서 감정에 의해서 모든 신앙의 척도를 설명하려는 부류의 싸움이었다.

  이런 와중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Religious Affections; 양낙흥 교수님이 번역해 사용하는 표현대로 하면 정서이다. 앞으로 정서라는 단어를 사용하겠다. 사실 affection의 가장 적당한 번역은 감동이다. 다만, 우리나라 말의 감동에는 긍정적인 면이 많은데, 강한 감동을 받아 긍정적이든, 부정적인 행동이 나오는 것이 affection 이라 할 수 있다)이란 책을 통해 종교적 정서란 무엇이고, 그 위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종교적 정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는 열두가지 표지들과 거룩한 정서들의 열두가지 표지들을 제시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실 종교적 정서 외에도 정서에 대한 다수의 책을 썼다. 이 책들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운동과정에서 나타나는 정서의 표현들이 위험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서는 의지의 근본적 기능이며 행동의 근원이므로 참된 신앙은 큰 부분에 있어 거룩한 정서들에 존재한다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참된 종교는 대체로 거룩한 정서들을 지닌다고 설명하며, 합리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을 편다.
  그리고 거룩한 정서는 성경을 근거로 해야 하며, 만약, 아무리 황홀한 정서의 체험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에 위배된다면 그것은 거룩한 정서가 아니라며,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반론 또한 펴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5살때부터 움막을 짖고 기도생활을 통해 풍성한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이며, 그 당시의 엘리트 코스의 교육과 방대한 저서를 남긴 위대한 철학자, 신학자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이런 배경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영성과 지성을 가지고, 정서에 대해 논증하고 있다 하겠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서에 대한 견해는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통 신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이성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감성적인 은혜가 부족한 반면, 감성적인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신앙을 이해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