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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실, 소박한 일상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2006, 11, 28

강영안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늘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다양한 언어구사능력이다. 우리나라 말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용어들을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어, 영어, 중국어,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일본어(지금까지 강영안 교수님의 강의를 여럿 들으면서 사용하신 언어들이다)를 사용하며 풀어나가시기 때문이다.
이런 강영안 교수님에게 히브리어(유대인)와 러시아어(러시아태생),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책을 읽고 그 문화와 함께 숨을 쉬면서 작업한 ‘네 문화의 철학자’인(타인의얼굴, p.19) 엠마누엘 레비나스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며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그러나 전통적인 서양 철학에 대해서 이제까지 제시된 어떤 사상가보다 더 강력하고 근본적으로 도전한(타인의얼굴, 손봉호 추천사 중) 그의 사상을 간단히 살펴보자.

레비나스는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의 출현으로 인한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보면서(본인 또한 프랑스군 통역장교로 복무중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고, 부모와 두 남동생이 학살되었다) 자유와 존재를 추구하는 유럽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라는 물음 가운데 이것은 타자에 대한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서양철학이 빚어낸 파국이었음을 지적하며, 그동안 서양철학이 추구했던 전체성(전체주의) 속에서는 한 인간의 인격을 하나의 체계에 종속시키고, 전체 체계속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은 어떤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제거(p.30)시키는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즉, 나를 중심으로 다른 것들을 통합하는 “전체성”을 통한 주체성을 비판하며, 나에게 사로잡히지 않는 것, 내 손아귀에 거머질 수 없는 “타자(무한)”와의 관계를 통해 주체의 주체성이 이루어질 있다고 역설한다. 이때의 타자는 철저히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p.112/ 이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 정의를 righteousness로 해석할 때 말하는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이다)이다.
이런 타자들은 지금까지 제한 없이 자유를 행사하던 나(주체)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p.182) 타자들의 벌거벗은 얼굴을 보게 될 때 나는 타자들을 수용하고 환대(hospitality)하는 것을 넘어, 책임(responsibility)지고, 더 나아가 대속(substitution)하게 된다.
다시 말해, 주체의 주체성은 타자들을 환대하고, 그들의 벌거벗음을 책임질때, 가능하게 된다. 칸트가 ‘자유해서 책임질 수 있다’라면, 레비나스는 ‘책임질 수 있을때 자유해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일면 유대인으로서 구약성경의 정의(justice, righteousness)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입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기독교시민운동을 하는 기윤실에 있어서도 좋은 모티브를 제공한다 하겠다.
단순히 존재와 행함의 차원을 넘어 내가 존재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이고, 타인과의 관계는 단순한 환대가 아닌 그들의 아픔에 대해 응답하고, 책임지고, 나아가 나를 내어주는 대속에 이르러야 한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손봉호 교수님의 추천사처럼 ‘개종에 버금가는 급진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말년 필립 네모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있음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다른 사람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윤리와 무한, p.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