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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② - 전상진 교수(서강대 사회학과)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②


※ 이 글은 5월 8일, 평화다방에서 진행된 토론회 원고를 편집한 것입니다. 


발제 1.

세대갈등 프레임의 쓸모

광장의 대립을 세대 다툼으로 만들어 이익을 챙기는 세력들

전상진 교수 (서강대 사회학과)

 


나는 세대사회학자다. 세대가 관심을 받을 때 내 연구도 주목받는다. ‘물썬 때는 나비잠 자다 물 들어야 조개 잡듯’한다는 속담이 있다. 때를 놓치고 뒤늦게 행동하는 게으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말이다. 지금은 ‘물썬 때’다. 열심히 일할 때다.

 

광장의 소란은 세대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서로 으르렁대는 촛불과 반촛불로 광장이 가득하다. 촛불은 젊고 반촛불은 노숙하다. 고로 촛불과 반촛불의 대결은 세대들의 싸움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세대전쟁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외관 상 그것은 젊은이와 어르신의 싸움처럼 보인다. 특히 반촛불 집회를 생각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그곳에서 노인들은 정말 사회 전체와 상대한다.

광장 집회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그 참여 인원의 속성을 적확하게 판별하기 어렵다. 여론조사가 밝혀낸 탄핵에 대한 연령별 의견으로 그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여러 조사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탄핵을 찬성하는 의견은 20~30대에서 매우 높고(90% 이상) 60대 이상에서 상대적으로 낮다(50~60%). 둘째, 모든 연령층에서 인용 의견이 우세하다. 셋째, 찬성 의견이 반대 의견의 대략 5배 정도 된다. 그에 비추자면 세대 대결이라는 주장은 명백한 과장이다. 그렇다고 연령이나 세대에서 비롯한 차이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명 긴장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갈등이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세대갈등 프레임 말고 다른 틀로 광장을 살피는 방법이 있다. 예컨대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 또는 법치주의와 반법치주의의 대립 프레임이다. 범법을 저지르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촛불과 제대로 ‘엮인’ 대통령을 구조하려는 반촛불의 싸움이 그것이다. 그것은 세대 프레임과는 전혀 다른 동기와 목적과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세대 프레임은 대립하는 세대 성원의 상호인정을 전제한다. 갈등하는 두 세대는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정당화한다. 연장자 세대의 전횡에 맞서 새로운 미래를 열려는 연소자 세대의 저항 또는 젊은이의 일탈을 바로 잡아 사회를 수호하려는 어르신의 ‘질서 있는 제어.’ 서로 싸우더라도 목표는 동일하다. 세대 공생이다. 젊은이가 늙은이의 억압에 저항하지만 목표는 그들의 제거가 아니라 그들과의 평화로운 삶이다. 반대로 어르신이 나이어린 녀석들의 방종을 다스리지만 목표는 그들의 제거가 아니라 유산을 보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와 달리 민주ㆍ법치 프레임은 엄격하다. 공생보다 판결이 우선이다. 실제 행위가 민주적 원칙에 부합하는지 또는 적법한지를 사실 관계에 근거해서 따진다. 다수의 스모킹 건이 뿜어낸 연기가 포연처럼 자욱해진 지금, 대통령의 혐의는 의혹의 수준을 이미 넘어섰기에 정당성의 측면에서 촛불과 반촛불은 뚜렷하게 갈린다. 증거에 입각한 민주ㆍ법치는 애당초 음모론과 연민과 오롯한 권력의지에 의존하는 반민주ㆍ반법치와 싸움을 벌일 필요조차 없었다.

어떤 프레임으로 광장의 소란을 보는지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 세대 프레임이 “상대방의 선의를 인정”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면, 민주ㆍ법치 프레임은 원칙과 법의 위반 여부를 중시한다. 그러니까 후자보다 전자에 여지가 많다. 갈등하는 세대들은 서로 싸우더라도 상대방을 인정한다. 상대가 자식이거나 부모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이 긴요하다. 광장의 대립을 왜 세대갈등으로 보려고 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 어떤 정치적 이익을 챙길까?

 

첫째, 반촛불 정치세력의 이익. 대통령과의 거리(“진박”, “골박”)가 정치적 프로그램인 세력은 대통령의 추락과 함께 힘을 잃었지만, 맞불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광장으로 진출하면서 부활하였다. 친박세력은 민주ㆍ법치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회피한다. 그것으로는 자신들을 도무지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대갈등 프레임이 안성맞춤이다. 반민주적ㆍ범법 행위는 무대 뒤로 사라지고 세대의 의견(취향) 차이가 앞으로 나선다. 당신 세대의 의견을 존중할 테니 우리 세대의 그것도 그렇게 하라.

그렇게 사실 여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도록 만든 후에 본격적 주장을 제시한다. 종북세력의 음모를 간파한 ‘우리 현명한 애국 어르신’과 그들에게 조종당해서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은 '젊은 녀석들‘. 그렇게 판을 짬으로써 친박세력은 노인들의 고통을 정치적으로 착취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왜 진보는 무능하고 보수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가』(시대의 창, 2016)에서 장신기는 장ㆍ노년층이 진보를 멀리하고 보수에 애착을 느끼는 까닭을 복합적 소외로 규명했다. 노인 빈곤과 노인 자살률에 있어서 한국은 OECD국가 중에서, 그것도 수년째 압도적 1위다.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에서 어르신들의 “총체적인 소외의식”도 크다. 삶도 힘들고 사회적 무시도 참을 수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퇴물 취급이나 당하고 살기도 힘들고 참. 젊은 사람들은 우리 같은 늙은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 못할 거야.”

보수세력은 박정희, 육영수, 박근혜라는 아이콘을 통해 그들에게 자긍심을 제공하여 소외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내가 비록 지금은 이렇지만 소싯적에는 무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일했지 그런데 대통령이 자신들을 배신했을 수도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 너무 버겁다. 반촛불 세력의 정치적 메시지는 그러한 노인들의 손상된 자긍심을 치유한다. 단지 ‘엮인’ 것뿐이래. 어휴, 그럼 그렇지. 치유의 대가로 소외와 억하심정에서 비롯된 정치적 에너지를 지불한다. 그렇게 딜이 성사되었다. 노인들은 치유 수단을 받고, 정치세력은 그들의 지지를 얻는다. 극단적 구호와 행동이 문제라고? 아니다.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사람들이 맞불 시민을 혐오하고 적대할수록 에너지는 커지고 지지층도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둘째, 친촛불 정치세력의 이익. 한국의 진보세력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언제나 젊음과 진보에서 찾기에 노인들의 사정에 별반 관심이 없다. 특히 21세기의 크고 작은 선거에서 자신들의 지지자를 동원하고 결속하기 위해 낡음과 새로움, 늙은이와 젊은이의 대립을 이용했다. 그렇게 노인차별이나 혐오를 유포한다. 멀게는 2007년 대선 후보의 해프닝(“노인 분들은 투표 안 하고 집에서 쉬셔도 된다”), 가깝게는 “선거연령 18세 하향”과 “공직자 연령 제한의 제도화” 주장이 있다, 선거연령과 연령 제한은 모두 충분히 토론되어야 할 사안이다. 다만 그러한 논쟁적 사안들을 거의 같은 때에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주된 지지층이 누구인지를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자백한다. 또한 친촛불 정치세력은 젊은이들의 투표 독려에 주력했다. 자신들의 정치적 프로그램이 특정 연령층만을 조준하지 않는데도 그런다. 어차피 노인은 보수를 지지할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청년에만 공을 들이는 것이다. 박력은 인정, 그러나 참 아둔하고 무모한 박력이다. 이미 궤도에 안착한 저출산고령화 추세를 고려하면 더 그렇다.

 

광장의 소란을 세대갈등으로 보면 안 된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세대들의 싸움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 곧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문제임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노인 혐오와 차별도 키운다. 혐오와 차별은 어르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더 강하고 독하게 만들어 그들의 고통을 착취하는 정치세력의 배만 불릴 것이다. 대응역시 더 강해지고 독해질 것이며, 노인 혐오와 차별역시 더 세질 것이다. 그렇게 소외와 혐오와 적대의 악순환이 공고해질 것이다. 사회적 갈등의 해결이 정치의 목표라지만, 현실 정치는 절대 그렇지 않다. 착취할 수 있는 갈등이라면 오히려 독려한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지역 차이를 지역갈등으로 ‘제도화’(“우리가 남이가”)하였다.

 

요즘 가짜 뉴스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가짜 세대전쟁’도 걱정해야 한다. 싸울 일이 아님에도 싸움을 부추겨 잇속을 챙기려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방심하면 가짜 싸움이 진짜 싸움이 된다. 광장의 소란이 진짜 세대전쟁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비록 내가 세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으로 먹고사는 세대사회학자일지라도.



* 원고는 아래 제목으로 실린 글이다. 「광장 대결이 세대 갈등 촉발해선 안 돼」, 『월간 헌정』. 2017. 03, pp.48~51. 



2017/06/08 - 새로운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 손봉호 자문위원장

2017/06/08 - 새로운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①- 양희송 대표(청어람AR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