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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그리스도인/자발적불편운동

자발적불편운동 세미나 "불편한 성도, 아름다운 세상" 강의 녹취록

자발적불편운동 세미나

"불편한 성도, 아름다운 세상"


손봉호 교수님과 박총 원장님이

같은 주제로 강의하셨다고요??

참석하지 못하신 분을 위해

녹취록을 공유합니다.


세미나 사진 더보기(클릭)




손봉호 교수님과 박총 원장이 같은 주제로 세미나를 하다.(좌 박총 원장, 우 손봉호 교수)


 

손봉호 교수


 

주제 : 자발적불편운동과 기독인의 책무

강의 : 손봉호 교수(기윤실 자문위원장)


오늘은 불편운동과 기윤실의 본질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야고보서 4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인간 가운데 여러 싸움이 있지만 대다수가 욕심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이 없다면 갈등은 있을 수가 없다. 욕심 때문이다. 결국은 두 쪽이다 혹은 한 쪽이 고통을 당한다.

과거에는 자연이 사람에게 고통을 가했다과거에는 자연과 더불어 보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대 사회는 자연과의 관계는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c.s. 루이스가 인간의 고통의 5분의 4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큰 욕망도 없다면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욕망 생존을 위해서 별수 없지만, 생존 이상의 욕망을 부리다 보니까 갈등과 억울함이 생긴다. 그러므로 정의가 요구되는 것은 불의가 있기 때문이다. (J.S. Mill)

 

아리스토텔리스의 정의란 같은 경우는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얼마전에 M. Sandel이라는 사람은 ‘fit’ 으로 설명했다. 자격 있는 사람은 자격 있는 사람으로 알맞게 대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John Rawls는 평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에 대해서 말한다. 평등의 원칙은 모든 사람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는 같은 경우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귀족과 노예는 평등의 원칙에서 다르게 생각한다. 귀족은 귀족답게, 노예는 노예답게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을 같은 것이라 하는 기준이 다르다.

 

모든 갈등에는 강자와 약자가 있다. 정의가 요구되는 것은 약자가 강자에게 당하기 때문이다.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약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약자의 보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고아와 과부, 객을 돌보고, 약자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다. 약자를 향한 끈질긴 편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정의이다.

편애라고 하면 정의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정의이다. 왜냐하면 약자는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약자를 보호하면 그것이 정의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아주 구체적인 상황에 관심을 기울인다. 가장 약한 사람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을 주목한다.

 

인류는 예의, 윤리, 법률 등의 제도를 통해서 정의를 실현하려 한다. 그들은 모두 이웃에게 해를 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소극적인 사랑이다. 예의, 법률, 윤리도 다른 사람 해가 되지 행동하는 것. 이것들은 소극적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소극적인 것이다. 무엇을 한다라기보다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 않는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적극적 사랑은 나눔, 재물, 시간, 재능, 건강, 기회 등 여유가 있는 사람이 그런 능력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오히려 한국 교회는 적극적인 사랑은 비교적 잘 하나 소극적 사랑에 실패했다. 그러나 소극적 사랑이 우선이다. 십계명도 소극적 명령이다.

복지기관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가 운영을 한다. 적극적인 사랑은 한국교회가 뒤처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극적인 사랑에는 한국교회가 잘하지 못 한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아가페는 욕망의 절제를 전제로 한다. 절제 없이는 소극적인 것도 안 되고 적극적인 것도 안 된다.

신약학자 다드(C.H.Dodd)사랑은 감정이나 애정이 우선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능동적인 의지의 결단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명령될 수 없는데 비해서 사랑은 명령될 수 있다.”

“It is not primarily an emotion or affection; it is primarily an active determination of the will. That is why it can be commanded, as feelings cannot.”

아가페는 의지의 문제이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감정으로 할 수 없다. 수동적이 될 수가 없다. 사랑은 명령이다. 명령은 의지를 함축한다.

  

스웨덴 신하자 니그렌(A. Nygren)<아가페와 에로스>에서 에로스의 특징을 (1) 욕망의 사랑 혹은 얻고자 하는 사랑 (2) 인간이 신적인 것으로 가는 길, (3) 자기중심적 사랑으로 이야기했다. 여기서 (2) 는 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리스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이다.

 

에로스는 감정적인 끌림에서, 아가페는 의지의 결정에 따라 감정의 요구를 억제하고 절제함으로 가능하다. 성경은 사랑하라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명령은 그대로 두면 하지 않기 때문에 내리는 것이다. 명령한다는 말은 벌써 스스로를 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에 역행하는 어느 정도의 절제가 포함되어있다.

 

모든 비윤리적인 행위는 이기주의적 욕망에서 나온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 등 자신의 욕망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자발적 불편운동은 이웃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함으로 가능하다. 예의, 윤리,준법도 절제를 전제로 한다. 윤리적으로 행동한다는 말은 절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발적 불편운동이라는 것은 스스로 불편하게 한다.

대부분의 종교와 문화에서 절제가 강조된다. 미숙한 사람과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절제하지 못한다. 

고대 그리스인의 4대 미덕은 지혜, 용기, 정의, 절제이다.

명심보감에서 인간이 아니면 참지 못하고, 참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다.’ 적혀있다.

 

미셸교수의 ‘stanford marshmallow experiment’은 절제가 성공의 조건임을 증명했다. 4-5살 정도의 유치원 학생 30명 앉혀놓고 미국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쉬멜로를 15분 참으면 하나 더 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아이는 바로 참지 못하고 먹고, 어떤 아이는 15분 참고 하나 더 먹는다. 즉시 먹은 아이들의 대다수는 마약 중독자 혹은 감옥에 들어갔지만, 15분 참았던 아이는 좋은 직장 혹은 근실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절제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라는 것을 보여준다. 절제라는 것은 선천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쉬운데 후천적인 영향과 관계가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

 

Rochester University의 변형된 마쉬멜로 실험(2016)는 신뢰가 절제를 돕는다는 사실 증명했다. 절제와 신뢰는 상호작용이 있다. 여기에 운동의 목적이 있다. 약속의 신뢰성이 인내와 연관이 있다. 기윤실의 운동은 절제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도록 하기 위한 운동이다.

 

사회학자 베버(M.Weber)는 종교개혁자들은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했다. 일상 한 가운데서 금욕을 하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특징이었다. 루터는 절제하면서도 이웃을 돕기 위한 노동을 강조하였다. 칼빈도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동해야 한다고 했다. 둘 다 노동을 강조하였다. 노동이라는 것은 괴로운 움직임이다. 불편하다. 그것을 굉장히 강조하였다.

중요한 것은 두 분이 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서 절제하는 것이다. 베버는 열심히 일하면서 쓰지 않으니까 자본주의가 태동했다고 말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노동을 강조하면서도 절제도 강조한다. 이것이 개신교의 위대한 전통이다. 성경에도 절제가 여러 군대 강조되어있다.

 

독일신학자 그룬트만 (Walter Grundmann)은 고대 그리스도인들이 강조한 절제는 자신의 고매한 인격을 위한 것이었고, 성경이 가르치는 절제는 이웃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바로 에로스와 아가페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모든 윤리는 절제를 전제로 하는데, 누구를 위한 절제인가에 차이가 있다.

내가 절제함으로 이웃이 덕을 보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내 자신을 위한 절제인가(에로스). 이웃을 위한 절제인가(아가페) 예수님은 그들을 왜 이렇게 싫어하셨을까? 자기 의를 위하여 일하였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이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늘 대부분의 크리스찬에게도 대부분이 적용된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이웃이 이익을 보는 것이다.

 

칸트, “선한 의지가 선한 이유는 그것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이나 성취할 수 있는 결과 때문도 아니고 제시된 목적을 달성하기에 적절해서도 아니다. 다만 의지 그 자체 때문에 선하다. 즉 선한 의지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이 말은 전형적인 에로스이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 윤리를 논하며 동기윤리책임윤리를 구분하고 정치에는 후자가 중요하다 하였다.“ 정치는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이것이 성경에 가깝다. ‘나는 동기가 선했으니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선하다라는 말은 굉장히 무책임한 말이다. 우리의 윤리는 내가 얼마나 행동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행동하고 절제함으로 내 이웃이 얼마나 덕을 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칭찬받고, 내가 윤리적이 되고, 내가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덕을 끼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윤리는 자신의 의” “자존심자신의 양심때문에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하여 절제함으로 가능하다. 이것이 아가페에 충실한 윤리이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있다. 바울도 이웃사랑을 주로 강조하였다.

 

절제에는 경제적인 절약도 포함되어있다. 모든 소비는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을 가져오므로 지금의 약한 이웃들과 후손들에게 해를 끼친다.

그리스도인이 절제로 자발적 불편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우리가 나그네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우리의 불편을 하나님이 보상해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발적 불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자발적 불편운동은 건강하고 참된 믿음을 전제로 한다. 감사합니다.




박총 원장


주제 : 기꺼운 불편함

강의 : 박총 원장(도심 수도공동체 신비와 저항)


제 복장이 특이하죠?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5년전부터 하고 있는데, 개신교에 익숙하지 않은 복장이다. 개신교 안에도 수도원들이 있다. 프랑스 파리에 유학을 갔었을 때, 170년된 개신교 수녀원에 간 적이 있었다. 제가 입고 온 옷이 수도사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로마의 국교로 정하면서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권력과 돈을 붙잡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베네딕토가 그것에 반하여 수도사들의 복장을 이렇게 정하였다. 이 옷은 그 당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옷이었다. 근데 옷이 같으니깐, 가난한 이들과 수도사들과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도사들을 허리에 띠를 둘렀다. ‘저를 기꺼이 그리스도께 맵니다라는 의미이다. 모든 수도사들은 3가지로 띠를 매듭지어서 서원을 한다.

첫째 매듭은 가난과 결혼하고 가난에 서원했다두 번째 매듭은 정결입니다. 세 번째 매듭은 순명이다.

그 중에 저는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하나님은 결코 성공의 하나님이 아니라 가난의 하나님이다.

 

덜 벌어 덜 쓰는 불편함.

 

2011년도 복음과 상황 편집장을 하다가 '세상을 바꾸는 15분' 이라는 촬영을 하게 되었다. ‘197만원으로 6인 가족 신나고 알차게 살아가기 였다.’ 제가 애가 넷이다. 그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6인 가족 최소생계비가 197만원이었다. 밀월일기에는 60만원으로 결혼하는 이야기도 있다. 다 불편한 일이다.

 

돈이 없으면 찌질하다. 친한 후배가 마산에서 결혼한다고 축하해달라고 했는데 왕복 차비가 없어서 못 갔다. 그러함에도 가난은 힘들고 비천하게 만들지만, 기독교의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지만 술자리에서 돈이 최고야라는 이야기를 한다. 정기적인 종교생활을 하지 않더라고 돈이 인생이 만약에 최고의 가치라면 한국사람 이라면 돈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경제적으로 불편하게 살아가라고 하셨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왜 하나님은 야박하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셨을까?

동시에 신앙인들의 삶의 수준은 이스라엘의 광야를 떠돌던 시절과 다를 바가 없다. (문자적으로 볼 때는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이라면 오늘 내가 성실히 일해서 내가 먹고 마시고 내 가족과 먹고 마시고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맞다. 만나가 하루가 지나면 썩어서 냄새가 난다. 오늘날에도 돈 벌어서 쌓아두고 모은다면 냄새가 난다.

 

우리가 신뢰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재물이 스물스물 늘어나면서 통장과 돈을 바라볼 때 안정감이 든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힘들더라도 불편하게 살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너가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땅이 너에게 소산을 줄 것이다.’ 하나님게서는 이것을 인간 삶의 실존으로 우리에게 남겨주셨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다. 우리 인간의 삶이 가장 힘든 것은 먹고 살아가는 일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보면 민망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진다. 그 마음을 갖는 것이 마땅한데, 엄동설한에 나와서 폐지를 줍고 있는 할머니를 볼 때 어떠한 마음이 드는가?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너도 공부 안하면 이렇게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개혁 세미나에 강연을 하러 갔는데, 화성시 환경운동 연합 후배가 유기농 유정란 3판을 줬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화장실에서 12시에 대변기를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아주머니에게 나도 모르게 유기농 한판을 건내드렸다. 노동은 곳곳에 있다. 인간으로서의 삶은 고통이다. 이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시작이라 생각한다.

 

성경에 가난에 대한 이야기 많이 나온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조금 더 편애하신다. 가난과 메시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초개교회로 돌아가보자. 디다케라는 문서에 나와있는 구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보통 구제를 할 때, ‘자 이거 드십쇼 힘드실텐데라고 말하면서 주는 사람은 우월해지고 받는 사람은 열등해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초대교회 때에는 나눠주면서 미안하다고 그랬다. ‘제가 당신께 빗진 것을 이제야 돌려드립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구제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높은 수준의 윤리를 요구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가난하게 사는 것에 기준이 있느냐? 없다. 존 스토트 신부님은 3세계 형제, 자매의 경제 수준을 고려해야한다.’ 라고 하였다. 자기 노트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계 5%안에 드는 사람이다. 우리가 비교대상을 한국의 잘 사는 사람들과 비유할 것이 아니라 가진 것 없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제 3세계 사람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래도 현실적인 가난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부자는 되지 말자. 부자의 기준은? 평균 생활비 이상을 쓰지 말자. 6인 가족 생계비가 500만원 그럴 것이다. 그 이상은 쓰지 말자. 목사 안수 후배자들에게도 교회 회중의 중간 정도를 넘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 가난이라고 세게 이야기했지만 타협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불편함.

 

우리의 삶이 굉장히 불확실성 해졌다. 청년들을 주례하면서 느낀 것이 불확실성이 너무 많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후부터 불확실성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들어섰다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 정해지지 않은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엄청난 불확실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는데, 그 불안한 스텝이 가장 확실한 안정된 스텝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불확실한 명령을 받들고 나갔던 걸음을 거룩한 불안정성이다 그리고 그 거룩한 불안정성을 받들고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하늘로 뿌리를 내린 풍랑과 같은 것이다. 궁극적인 젖줄은 하늘에 있다. 그 불확실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약자와 연대하는 불편함.

 

로마서 1216절에 보면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 라는 말씀이 있다. 번역의 아쉬움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류층에 올라가려고 애쓰지 말고, 오히려 기꺼이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라.

 

하류 지향하라. 우리가 강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약하게 머무를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시는 것이 복음이다.

 

왜 약자와 연대해야 하는가? 고아와 과부는 항상 억울하다. 신원하라고 말씀하신다. 근데 깨닫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라고 하셨을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한다. 우리가 그 사람들과 기꺼이 연대해야 하고 그 불편함을 기꺼운 감내하는 것이다.

우리가 불편하도록 감내해야하는 것은 연대함에 대한 것이다. 내가 불편하더라도 함께하는 것이 연대이다. 연대하면서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편협함 내 중심성이 깨지는 것이 연대이다.

 

동료 피조물과 더불어 사는 불편함.

 

창세기 1장을 보통 이것저것 만든 후에야 인간이 있구나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굉장한 오만이다. 이들 모두가 동료 피조물들이다. 이제 겨울이 되면 싫은 것이 미세먼지이다. 근데 항상 인간만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길냥이들도 미세먼지를 마신다. 미세먼지를 생각할 때 동료 피조물들의 불편함들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나무도 고통을 받다. 연대한다는 것이 내 중심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피조세계 전체적으로 봤을 때에는 생명 중심주의로 옮겨가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율법이 되고 마나니

 

사실은 우리 안에 애정이 없다면, 아주 긴 하지마목록만 작성하고 마는 것이다. 진짜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면 내가 어떻게 일회용품을 쓰고 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사랑이 있으면 많은 열거된 목록들을 생각하지 않아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꽃도 단순하게 스쳐지나가듯 보면 그 꽃에 대한 관념만 확인할 뿐이다. 진정으로 꽃을 유심히 쳐다보고 주의를 기울일 때 그 꽃에 대한 애정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지 유심히 보지 않으면 관념만 재확인할 뿐이다. 유심히 볼 때 그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웃과 자연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봐라. 유심히 보면 사랑이 생긴다. 유심히 보면 우리가 기꺼이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는 애정이 생긴다. 여기서 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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