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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그리스도인

[비전메세지] 종교개혁과 경제정의(손봉호 자문위원장)

[비전메세지] 종교개혁과 경제정의











글_손봉호 자문위원장


클린턴 후보는 “역시 경제야!”(Stupid, it’s economy.)라는 입장에 서서 득표운동 함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이겼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선거에는 역시 경제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내걸어야 표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세상에서는 정치, 과학기술, 학 문, 교육, 연예, 스포츠, 심지어 종교까지 경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역사상 경제 가 이렇게 중요해진 때는 없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돈의 가치는 공유불가능(共有不可能, zero-sum)한 하급가치 다. 돈은 경쟁을 유발하고 경쟁의 패자는 항상 약자다. 약자이기 때문에 경쟁에 지 고, 경쟁에 지기 때문에 약자가 된다. 그런데 경쟁에는 항상 부정의 유혹이 따른다. 정직하기로 유명했던 독일에도 폭스바겐 사태가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리먼 브라더 스 사건이 벌어졌다. 경쟁이 공정하지 못하면 약자의 고통은 그만큼 더 커진다. 경 쟁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에 가장 요구되는 것이 경제윤리며 경제 정의다. 요즘 제기되는 정의 논의는 보응의 정의(retributive justice)가 아니라 전적으로 분배의 정의(distributive justice)란 사 실도 이런 요구를 반영한다.  


최초로 정의를 이론적으로 다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正義)를 “같은 경우는 같 이 취급하고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라고 정의(定義)했다. 그런데 그는 귀족과 노예는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와는 달리 기독교 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원칙적으로 평등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재하는 인권사회에서는 항상 빈 부, 남녀, 귀천, 유·무식 등의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정의를 위한 기독교적 노력은 이 차이를 가능한 한 줄이고 제거하는 것이다. 성경은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 는데, 고아, 과부, 객(이방인), 가난한 자, 병든 자, 장애자, 소외된 자 등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동안 자본주의는 빈부격차를 확대해 놓았고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 는 과학기술은 이를 극대화하고 있다. 영국의 유서 깊은 구호단체 옥스팜(Oxfam) 대표는 지금 전 세계의 부의 절반을 62명이 누리고 있고 세계 인구의 1%가 전체 부 의 99%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빈부격차가 늘어나는 큰 이유 가 운데 하나는 노동을 통해서 버는 돈보다 돈을 통해서 버는 돈의 액수가 더 커졌다는 사실이다. 무능하고 게을러도 돈만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부익부 빈익 빈 현상은 더욱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Max Weber)는 자본주의가 종교개혁, 특히 칼뱅주의에서 태동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견이 없지 않지만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오늘 날의 개신교인들은 그 주장을 다시 한 번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루터의 소명론(召命論)과 칼뱅의 예정론에 근거 해서 신자들은 자신의 직업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소명이고 그 직업에 성공하는 것이 곧 자신이 구원받도록 예정되었다는 증거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노동해서 많이 생산했으나 철저히 절제함으로 성 공해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칼뱅은 이자 받 는 것을 허용했으므로 상업이 번창했고 돈이 돈을 버는 오 늘의 상황에 단초를 마련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직 업에서의 성공이 곧 예정의 증거로 보았다는 베버의 주장 에는 이의가 많다. 그러나 소명론, 근검절약, 이자허용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고,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다 할 수는 없 어도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의 개신교인들은 자본주의의 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칼뱅이 이자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는 올바른 이해 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에서는 돈은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수 없다(sterile)고 보았고 중세교회 는 꾸어 준 돈에 대해서 이자 받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 였다. 그런데 칼뱅은 상업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그 시대에 돈을 빌려 사업을 하여 빌린 돈보다 더 큰 돈을 만드는 경 우가 엄연히 있는데도 돈은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는 것 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동족에게 는 이자를 받지 말라는 구약의 명령은 신약시대에는 적용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무조건 이자를 허용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전적부패 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칼뱅은 이자허용이 어떤 결과를 가 져올 것인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자를 허용하되 일곱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것을 요구했다. 가난한 자에 게 꾸어 주었을 때, 사업에서 이익을 남기지 못했을 때, 공 익에 어긋날 경우에는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되며, 국가에서 정해놓은 이율을 초과할 수도 없고, 대금이 직업이 되어서 도 안 된다고 했다. 그들 조건을 다 만족시키면 돈이 돈을 버는 오늘의 상황은 결코 일어날 수 없게 되어있다. 사실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예외 조항을 둔 중 세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세계는 경제에 관한 개혁자들의 가르 침 가운데서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 공익에 대한 관심, 돈 이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고 대금 그 자체가 직업이 되지 못하게 한 것, 부지런히 일하고 사치를 금한 것 등 정의로 운 경제활동에 대한 가르침은 거의 다 무시하고 다만 이 자를 허용한 것만 잘 수행한다.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충 실했더라면 오늘의 자본주의가 이렇게 위험해지지는 않았 을 것이다. 


현대 개신교는 바로 현대 사회가 무시해버린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회복해야 한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이익과 무 관하게 열심히 일하며 무엇보다 더 절제해야 한다. 베버는 종교개혁자들이 “세계내적 금욕”(innerweltliche Askese) 를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모든 절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돈 욕심을 절제하는 것이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며 (딤전 6:10), 돈에 대한 탐심은 우상숭 배 (골 3:5)라고 경고한다. 이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는 현 대사회에서 윤리적이 되기가 매우 어렵다. 모든 윤리는 정 의로 환원되며, 약자를 착취하지 않고 보호하는 것이 기독 교 정의의 핵심이다. 이런 정의가 무시되면 자본주의는 약 자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대한 재앙이 되고 말 것이다. 


독일 신학자 그른드만(W. Grundmann)은 헬레니즘의 절 제는 행위자 자신이 고상한 품격을 갖추는데 그 목적이 있 다면 성경의 절제는 이웃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했다. 모 든 이웃에게 이익을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고통당하 고 있는 약한 이웃에게 고통을 더 하는 악은 저지르지 않아 야 한다. 개인적으로 공정하게 행동하고 사회 구조도 정의 롭게 고쳐야 할 것이다. 



* 기윤실 창립 30주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2017년까지 <양극화를 넘어 더 불어 함께>를 주제로 운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회원님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 드립니다. 

* 이 글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월간지 월드뷰 2016년 5월호에 실린 내용을 해당 기관에 허가받아 전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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